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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변화

Views 11497 Votes 0 2009.04.15 21:50:35

사람이 변했다는 나쁜 뜻이고,

사람이 변한다는 가치 판단을 배제한 뜻 같고,

사람이 변할 것이다는 좋은 뜻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뜻이고,

변함 없는 사람은 좋은 뜻이다.

나는 내가 변했으면 싶은데 또 나는 내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가 변했으면 싶은데 또 나는 너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스스로도 돌면서 또 그 무엇을 거대하게 도는데

마치 나의 존재 자체가 변화와 과정 속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나는 사람이여서 기껏 '싶은데'...'좋겠다' 식으로밖에 말을 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변하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과 변할거야라는 결심은 언제나 눈물겹다.

상대방이 변화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억지스럽고, 변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언제나 절망적이다.

어쩔 수 없다. 정말 어쩔 수 없다.

일단 힘을 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시선을 하늘에 고정해 두어야 한다.

그 하늘은 어제와 다른 하늘이고 내일과 다를 하늘이겠지만 그런 항구적인

시선고정 조차 없다면 나는 나의 변화속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힘을 빼고, 시선을 하늘에 고정해 두었다면

그 다음에는 바람을 타야 한다.

살살살...살살살...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가볍게 몸을 실고

변해야 할 변함에는 변하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변화에는 변화하지 않기를

단지 바라며 그렇게 바람을 타는 것이다.

하늘에 고정 해 둔 시선이 이제 꽤나 익숙해 져 있다면,

이제 그 시선을 내려 지켜보자.

지켜봄속에는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포기가 있다.

아니 무엇보다 판단 중지가 있다. 그 판단을 종말에 걸어둔 채

지켜보기로 매일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저 무심하게 바라만 보는 것이다. 무심하게. 무심하게.

그렇게 무심하게 바라만 볼 수 있다면 어느 순간

그 지켜봄이 사랑이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랑'할'필요도 없고, 사랑'받을'필요도 없고, 사랑을'물을'필요도 없이

무심히 지켜보는 시선속에 사랑이 오롯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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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살이

April 15, 2009

'사랑'할'필요도 없고, 사랑'받을'필요도 없고, 사랑을'물을'필요도 없이

무심히 지켜보는 시선속에 사랑이 오롯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허.. 이런 글을 올리는 널 찬선아~ 라고 불러야 할지, 찬선씨~ 라고 해야 할지

찬선 어른!! 이라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지 누나는 잠시 헷갈리고 있단다.

 

이런 사랑은 누나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인데.. 넌 아직 불타는 사랑을 소망해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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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April 15, 2009

아 정신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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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

April 16, 2009

해석이 필요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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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선

April 16, 2009

- 해설 (횡설수설) -

하늘은 어느 정도 하나님 이미지다.

하늘은 우리가 고개를 들면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를 내려다 본다.

그렇기에 어느정도 초월적인 하나님 이미지를 풍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하늘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빛의 작용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어떤 현상이다.

그 현상이 매일매일 옷을 갈아입기에 우리는 어떤 단단한 실체가 저 위에 있는 줄 안다.

사실 하늘은 없다.

없는 하늘이 오랫동안 의미 있는 실체로 활동해 온 것은 재미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은 없어도 사실 하늘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하늘에 고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좀 체 비가 내리지 않는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을 상상해 본다.

물이 없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커다란 빨대를 만들어 입에 물고 하늘을 쳐다본다.

손바닥으로 비를 받을 줄 모르는 아이들은 그렇게 하늘을 향해 비가 내리기만을 기대한다.

그리고 비가 내릴 때, 빨대를 통해 졸졸졸 액체가 입안으로 흐른다.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하루종일 하늘만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하늘에의 시선고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못하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 일어날때 적절한 작용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우리는 매일 변한다. 지구의 자전만큼. 또 그만큼의 공전만큼.

변화가 본질인 우리가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하늘을 찾는다면?

변화(사람) + 고정(절대) = 상대 (변화)

변화(사람) + 변화(상대) = 더 큰 변화 또는 절대 (변화의 방향성에 따라)

문자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가지는 모든 신앙적 지식을 절대화 시키지만

사실 '고정'으로서의 '절대'가 상대와 만난다면 그 결과는 상대이다.

변화하는 우리가 절대적인 그 무엇을 찾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그 대상이 고정되어 있는 절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상또한 끊임없이 움직이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변할 때 상대방 또한 같이 변해야, 그때야 비로서 상대는 절대가 된다.

한 사물을 앞에 놓고 내가 자리를 조금 틀면 상대는 이젠 측면을 보여준다.

아까전과 같은 정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늘은 변화함으로 항상 그곳에 있다.

하나님의 절대 또한 상대로서 얻어지는 절대이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언제나 절대적이다.

 

우리는 길거리의 노숙자나 부랑자, 알콜 중독자를 사랑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무관심으로 귀결되기에

우리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다.

행위로서 무엇을 '주거나', 마음을 '받거나' 식의 오고 감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가지, 사랑과 두려움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매순간 사랑을 선택하라고 한다.

상대를 때리는 그 순간에도 사랑의 선택이라면 사랑이고,

친절을 베푸는 순간에도 두려움의 선택이라면 두려움이다.

그럼 이때의 사랑과 두려움은 개인의 판단에서 비롯된 순전히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의 선택을 하기위애서는 먼저 그곳에, 거기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단지 사랑에로 선택하기로 참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런 비난을 받아도 사랑에의 선택이면 사랑이다.

사랑과 두려움의 중간 지대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지켜보기로서 사랑에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언제나 나의 영역 안에 있는

대상들에 한정된다.

사랑을 선택한다면 상대를 지켜볼 수 있고 상호 평등의 관계가 유지된다.

또 어떤 때는 두려움이 작용을 하여 두려움에의 선택을 하는데 이때는 상호 평등의 관계가 깨어지고 내가 상대방

위에 올라타거나 그 밑으로 들어가는 두가지 밖에 남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외침에

하나님은 예수를 지켜보신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를 구하셔서

그 상황을 모면하게 했다면 그때는 하나님에게는 두려움이 작용하는 순간이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과 함께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God has Love가 아니고, God is Love인 것 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예수를 지켜봄으로써 예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예수를 '주셨다'고 한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를 주지 않으셨다. 예수를 보내셨을 뿐이다.

주다라고 한면 '누구에게'가 바로 뒤따라 나오지만,

보내다는 보내는 행위자 자체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누구에게 보내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예수를 주지 않은 이유는 예수는 그 자체가 본질이기에 무엇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들을 연결시켜야 한다.

언제나 변화와 변화하지 않음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

변화함으로서 변화지 않는 하나님.

지켜봄으로서 참 의미를 가지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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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남

April 16, 2009

아, 얄미운 '두 얼굴의 사나이~'

형님이 제가 있는 자리에 앉아있으셔야 하는데...ㅠㅠ

신앙은 실체의 물음으로부터 결코 동떨어질 수 없죠.

그 신비를 우리는 '계시'라는 형태로 해명해보려 하지만,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 같아요.

 불가능성의 가능성, 불확실한 확실함.

'말도 안되는' 따위의 말들이 언제부터 나에게 '확실한 무엇'으로

다가오는 이 경험의 초입에 언제나 '불안'과 '신비'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신비라는 것이 과연 불안을 잠식시킬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불안'이 불안으로 다가오지 않게되면 해결되는 것일까요,

실체를 경험한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의 확실성일까요,

'실존'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에게 실체가 '경험'되어진다고 진술하는 것은

과연 어떻게 밝혀질 수 있을까요...

 계시와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하나님의 관한 진술은 궁극적으로

경험의 자리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가 밝혀질까요...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을 참는 것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교의학 쓰신 분...

 

시도때도 없이 멎어버리는 안면근육이 다가오는 상황에 의해

언제그랬느냔듯이 다시 익숙한 움직임을 보이며, 미소를 만들지만 이 삶 즐겁다고 표현하면

가벼울까요... 형님~ 중간고사 끝나면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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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선

April 16, 2009

나미 형제,

실체와 인식의 관계는 신학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가 질문하게 되는, 아니 누구나가 도달하게 되는

질문인 거 같아.

나도 네델란드 라브리에서 공부할때 이부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거든.

내가 방안의 의자에 앉아 있어. 그리고 눈을 감고 있지.

그리고 누군가가 들어와. 난 아직 눈을 감고 있어.

그리고 눈을 떠. 상대방이 누구인지 인식해.

상대방이 실체라면, 눈을 통해 상대방을 알아봄이 인식이겠지.

난 어떻게 상대방을 인식했을까? 물론 눈을 뜸으로 인식을 했지.

그런데 잘 봐봐.

내가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상대방이 누군인지 그 실체에 대해 궁금해하지.

상상을 하고. 그리고 눈을 뜨면서.

'아! 재남 형제구나'라고 깨닫는다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체와 인식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없는 것 같다는 거야.

여기서 눈은 인식의 도구인데, 내가 실체를 인식하는 순간 실체만 나에게 가득할 뿐

'나의 눈이 인식을 했네. 나의 감각이 인식을 했네. 나의 손이 인식을 했네'

식으로 그 공로를 도구에게 돌리지 않는다고.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미래가 현재로 치고 들어오는 순간에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결코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실체에 어떻게 도달을 해야 하느냐의 방식(현재가 미래로)

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애.

내가 아무리 이 눈을 가지고 무엇을 인식해야지, 인식해야지 한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인식을 하게 되는 시점에 눈은 결코

'아~저기 실체가 있구나. 이제 인식을 해야지. 자..이제 인식했다. 저기 앞에 나미형제구나'

이런 식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단 말이야.

즉, 실체와 인식이 절차적으로 진행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당시에는 뭔가 큰 것을 깨달은 것처럼 이것을 논문식으로 썼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난 놀람으로 인식되는 하나님에 동의해.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경험은 놀람으로 나타나는 것 같고.

어딘가 썼지만

경험되지 않는, 인식되는 않는 실체는 사실 상상의 산물이여서 개념으로서의 실체이지

사실 우상이잖아.

문제는 그 실체를 인식한다고 덤벼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도구를 어떻게든지

그 상상의 산물에 맞춰보려고 하는데 이게 사실 가능한 일인것 같지는 않아.

오히려 실체에 대한 개념만 어렴풋이 잡아놓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놀람으로,

미래에서 현재로 쳐들어 오는 방식만을 기대한채 편하게 살아가는 수 밖에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며 경험하고자 하는데 그 마음이 상당부분 삐뚤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존재 또는 본질로서의 하나님 추구라기 보다 나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도구화시킴)

먼저 나는 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한 정립도 있어야 되겠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무조건 신앙적인 것은 아니니까.

정목사님이 어딘가에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버리라고 했지.

맞어.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도 버리면 더 좋을거야.

하지만 불쌍한 신학생은 향후 감당해야 할 어떤 역할 때문에 그러기가 쉽지 않겠지.

현재의 공부를 도구화 시키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시간 될 때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책을 읽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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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남

April 16, 2009

되려 형님의 글속에서 제가 고민하고 있는 점들이 간결하게 전해져오는 것 같아

시원합니다. 제가 의도하고자 한 것은 실체니, 하나님이니 하는 단어 혹은 개념에 정초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위의 하나님, 하나님 없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러한 표현들은 개념을 개념으로 밖에 접근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성으로부터 나온 불가피한 진술이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가능성, 불확실한 확실성. 문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한계를 안고도 전해지는 개념이 있지 않습니까.

신학적 진술들은 대부분이 그러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온 것 같습니다.

 

 실체 인식에 대한 관심 또한 굳이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진술이 실체와 인식의 관심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 질문에 붙잡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관심을 계시라는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러한 방식의 초입에 있어서 나에게 경험되는 '불안'이 '놀라움'의 방식으로 경험되어지겠죠.

바르트란 신학자는 신학자의 실존을 놀라움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놀라움이 없다면, 신학하지 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그 놀라움이라는 진술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안이 놀라움에 의해 사라질까요,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의 입장에서 그 놀라움은 불안, 긴장과 공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읽은 어떤 책에서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말함'에 대한 진술로부터 오는 당혹감을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무엇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더군요.

그러나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우리는 이러한 식의 경험을 말한다면 결국 개인의 실존에 터해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그것이 진술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옳고 그른 것이 드러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진술'로서 가능할까 하는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흔들리는 터전이라고도 하더군요.

이러한 실존적인 자리로부터의 문제를 인식하고  판넨베르크는 역사로서의 하나님 설계를 제시한것같아요.

자기계시-간접계시와 같은 방식의 개념들이 도움이 되는 것 같네요.

앗, 강의 시작 1분 전이네요.

형님, 오늘 즐겁습니다~^^

 

형님이 추천하신 책은 책장에 꽃혀있은지가 수개월이 지났는데...ㅡㅡ;

펼쳐보질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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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선

April 16, 2009

가끔씩 들추어보는 책에서 몇문장 인용해 볼께.

이하,

심광섭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다산글방,2003

 

 "일찍이 칸트는 그의 선험적 논리학 서론에서 다음의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적으로 파악하는 일(직관안에서 개념에 대상을 부가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어떤 문장이 이해된다는 것은 이해하는 주체가 사유의 운동 속에서 개념을 채운다

  는 것이다...(44p)"

 

 "신학은 전통적으로 성서의 개념과 언어, 정식화된 교리적 공식들, 신앙고백...등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무로부터의 하느님의 창조', '원죄와 타락'....등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나 개념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도대체 이런 것들이 실제 현실과

  어떤 연관성을 맺으며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새롭게 보여주는 말인지 매우 궁금해진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한다"는 문장은 올바른 문장이고 의미를 갖지만 그것

  이 지시하는 대상(reference)은 애매모호하다는 말이다. 과연 이 개념이 경험과 무슨 관

  련이 있으며, 이 가름침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구체적 삶과 무슨 연관성을 갖는가?..(45p)"

 

  "단어, 개념, 언어는 항상 어떤 사태와 경험을 지시하고 언급하는 지시대상을 갖는다. 모든

  개념은 그들이 성장해온 고유한 삶이 있으며 삶의 표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경우에만 의미

  있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개념이 그것이 언급한 경험으로부터 떠나 분리될 때, 그 개념은

  현실성을 잃고 한낱 인간 정신의 산물인 공허한 관념, 소외된 개념, 이데올로기가 된다.(46p)"

 

  "신학의 과제는, 왜 그리고 어떻게 신학의 용어와 개념이 우리에게는 이미 낡고 낯선 문화가 된

   그 당시 최초의 삶의 자리에서 상징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 신앙이 지금 여기, 자연과학

   , 세속적 자기이해와 자기실현,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동양의 전통 종교와 문화, 자유와 해방을

   향한 전 세계적인 외침이 지배하는 현대 인간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의미있게 보존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47p)" 

 

  여기서 세번째 인용 문단을 눈여겨 보는데,

  모든 단어 개념에는 고유한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여기서 모든 단어, 개념에 대한 100%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각자의 삶의 자리는 다르니 내가 어떻게 과거 그 단어를 생성한

  경험에 들어갈쏘냐)

  하지만, 그 개념을 생성하게 만든 경험과 100% 동일한 경험은 못할지라도

  나 또한 나의 삶의 자리에서 동일한 성격의 경험은 하고 있지 않겠어?

  난 그렇게 생각하네.

  목사님께서 종종 성서 기자들의 고유한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시는데.

  글쎄, 우리 또한 그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단지,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생성된 단어, 개념을 보면서

  "아! 내가 나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것들이 바로 그 개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구나'"

  라고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없는 경험, 경험하기 불가능한 경험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고유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삶의 자리를 박차고 과거로 숨어 들어가는 것은 아닌듯

  공부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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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남

April 17, 2009

 인용하신 문장들의 요지와 형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점이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자리로부터 형성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을 통한 진술의 불가피함,

동일한 경험과 동일한 성질의 경험.

이러한 표현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이해가 형님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의도하고자 한 것은 '성서기자들의 고유한 세계'로 들어가야한다는

진술의 근본적인 성격에 있습니다. 경험이라고 불가피하게 표현되는 그 무엇이,

소위 기독교에서 말할 수 있는 계시의 근본적인 성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그리스도교의 용어는 '하나님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사태가 간접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 이 현실경험은 결코 그날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열들감에 사로잡혀 없는 경험, 혹은 불가능한 경험'의 진술은 현실이해의 왜곡이 아닌 진실한 태도가 아닐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성서기자가 가리키는 하나님 경험'의 세계를 향해 여전히 들어가기를 고대합니다.

그들의 묵시록적 메시아 기대와 오늘의 우리가 맞고 있는 사태는 동일한 것이겠죠.

그러나 그들에게도,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그 경험의 긴장을 애써 외면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그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개인 실존의 영역으로 혹은 피상적인 '말씀, 그리스도 사건'이란 진술로 섣불리 다가가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술'이 갖고 있는 신비의 근원적 사태를 약화시킬 것 같습니다.

 예수 사건의 부활 진술을 선취라는 개념으로 언급합니다만, 여전히 우리가 고백하며 드러나길 바라는 이 진술의 근원적인 긴장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약화시키는 것은 되려 신앙의 신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늦게까지 같이 사는 친구와 이런저런애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 진술에 관해 제가 갖고 있는 이러한 긴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니...

현재까지 말이 없습니다...ㅡㅡ;

 이번 주는 형님께 찰싹 붙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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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리매

April 16, 2009

변화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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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선

April 17, 2009

그렇죠.

변화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변화하는 것은 생명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고로 하나님은 변화한다.

논리가 어째 맞게 돌아가나요?

이제는 하나님은 변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를

알아봐야 하겠죠.

이럴땐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을 읽어보지 않은게 감사한데

내멋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유와 잘못 생각한 것에 대한 책임 회피가 가능하기에 ㅋ

하나님이 변화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처럼 이랬다가 저랬다가 삐지고, 갑자기 약속 취소하고

이런 차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지금 문득 생각나는 것은 하나님 또한 성장한다라는 개념이에요.

하나님도 자란다. 하나님도 성장한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이해해 드려야 된다.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이런 것들이 죽 연결되겠네요.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기보다 형님, 친구로 부르는 것들...

하나님없이 하나님과 함께. 없이 계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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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리매

April 23, 2009

하나님이 변화한다..이부분은 아직 경험된 적이 없는것 같아요(아마도 내게 그분은 절대적이 존재로 각인 된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그런데 절대적인 존재라고 해도 인식하는 대상이 다양하면 상대적으로 느껴지겠죠? 변화한다고 느낄수도 있구요)

그런데 내가 관찰한 바로는 하나님이 변화한다기보단 인간의 인식이 변화됨에 의해서 그분을 다르게

변화되게 인식하는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며 달라지는 신에 대한 개념을 봐도 그렇고

그러한 변화로 인간의 모든 문화적 사회적인 패턴이 변화되더군요

인류의 역사와 내 삶과 신앙의 패턴을 둘러봐도 그렇게 느껴지네요

세상은 늘 그대로 인데..10대 20대 30대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이 달라진 것처럼요

그래서 변화한다는 것은 부정의 길이든 긍정의 길이든 대상과 끊임없는 역동성안에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같고 그것이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요

정체되있는 것이 때론.. 퇴보하는 것 보다 긴장되는 이유가 내겐 거기에 있어요

외부로 부터 어떤 새로운 인식이 각인되지 않는 상태가 가장 두려워지더군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내게 해당되지가 않네요

하나님의 존재와 내가 관념적으로 되는 것을 늘 두려워 하기 때문에 스스로 내린 결론이에요

마치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내 심장이 고통치는지... 음악의 리듬을 타며 어깨를 들썩일수 있는지

그런 상태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 처럼요(꼭지 음악 내가 왕 좋아하는 건데..ㅋ)

하나님과 예수님이 찬선씨와 어떤 형태로 어떤관계로 소통되는지..

난 아직 잘 모르지만...결론을 보니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맞나요?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찬선씨의 의문과 질문에 대답해주고 있을 것 같은데..

암튼 그렇게 싸울수 있는 사람만이 소모되는 것은 많아도 다시 놓치게 되지는 않는것 같아요

인생은 그차체가 기나긴 싸움이니깐요

남자는 대부분 가을을 탄다는데.. 아무래도 찬선씨는 봄을 타는 남자인듯...^^

 

 

profile

박찬선

April 24, 2009

라크리매님~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은 상당 부분

사람들의 요청, 기대에 기인한 부분이 많을 거에요.

항구적이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자연스레 '하나님=절대적'으로 결론이 내려질 수 밖에 없겠고요.

하나님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을 드리는 것은 아니고요.

모세의 간청 부분이 생각나네요.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고자 하였으나

모세의 간청으로 뜻을 돌이키셨다는 내용.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목사님께 여쭈어 봐야 겠네요.^^

지구 말고 우주에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또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또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배우시는 것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지하신 신이니까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인간들이 어떤지 인간을 창조하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다 알 수 있다?

글쎄요. 전지라는 개념을 이렇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마치, 하나님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무거운 것을 창조하실 수 있으실까?

창조하시고 못 드시면 전능이라고 할 수 있나?

이처럼 개념모순에 빠지는 것 같고요.

아무튼 배우시는 하나님이라면 변화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고

성장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배워가는 중입니다.

주일날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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