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과거를 돌아본다.

어쩌다가 우린 만나게 되었을까?

정용섭목사님의 서울 나들이에 함께 했던 그 인연...

그 전에 가끔 들어오고 나가면서 다비아를 알아 오늘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당신이 거기 있어 좋았다'

그렇게하다보니 만나고 사랑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아니 우리가 사귀어 걸어온 길이 4~5년 되었을까?

결과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시원하게해주었던

다비아와 정용섭목사님,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났던 선생님들...친구들...동생들...잊혀진 또 다른 이들...

문득 누군가, 아니 우리모두가 하나되어 움직이 이 열정이

오늘은 힘들다.

솔나무 개인적으로 힘이 드는 건

나를 바라보며 힘들어하는 무리들을 보며 그 안에 힘들어 못견뎌하는 그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힘들다.

그 동안 나 스스로가 나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알면 알수록 더 이해가 아니되는 사람...솔나무...

그동안 열정을 다해서 같이 길을 걸어왔던 동료들 조차도 돌출적인 행동,글쓰기를 힘들어 한다.

그러다가 솔나무 자체를 힘들어 한다.

솔나무 안에 있는 진정성이 글쓰기 형식에 묻혀서 잘못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자기들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더 힘들어하고 있다.

결국 나(솔나무)를 걱정하는 듯 하지만 같은 걸음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웃긴 이야기지만 내가 아무리 주변에 계신 분들과 소통을 하고자 해도

솔직하게 말을 하면 보여지는 내가 '나'라는 것이 내 스스로 '너는 누구니?' 라고 묻는 순간 혼돈스럽다.

 

간단하게 나를 한번 소개하고 싶다.

솔나무는 지금의 교회에서 지난 30여년을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다.

그동안 여러 목사님들이 장로님의 등쌀에 못견더 도망가듯 쫓겨나던 경험들...

어쩔때는 교역자들끼리 서로 갈등을 하다가 옴겨가게 되었던 일들...

교인들끼리 사이가 소원해져서 어떤 기회만 있으면 공동의 가치안으로 개인적인 문제를 끌여들어

싸우고 다투다가 결국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그 괴로움의 현장속에서 견디며 살아왔다.

처음에는 어린시절 무엇이 무언지 잘 몰랐다.

군대 시절 이후 어느정도 교회조직의 깊숙히 들어가게 되면서

교회학교교사로 섬겨오며 그 많은 갈등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이해...

왜, 우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나 이해하는 일에 이토록 모질게 움직이지 않는가?

인간은 오래 사랑을 하거나 한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음에 대한 반응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왔다.

어떤 갈등과 모순과 오해가 있어도 인내하며 그 안에서 갈등을 해소하고 회복하자는 요청이다.

교회가 어느정도 성장했는데 어느날 아주 사소한 일로 갈등이 커지면 결국 교회는 쪼개졌던 경험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교회의 어린아이들, 청년들,집사님,권사님...많은 교우들이 결국 사랑이 아니더라.

그러면서 오늘의 나는 어떤이라도 죽일정도로 밉거나 사람을 싫어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저 상대를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에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단, 동료들끼리를 넘어서 어떤 권력을 행사하는 입장에 있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역시

교회의 중직을 감당하는 당회나 교역자, 그리고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잘못에 눈을 감지 않는 것이다.

본 교회에서도 나를 몹시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정도 무시하고 저주하고 함께 몰아붇이면 많은 사람들은 대충 떠나갔는데

김성주라는 저 사람은 그런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런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공동체에서 남들과 갈등을 갖는다고 해서 밀려서 떠나지 않는다.

이런 모순들을 어떻게라도 해결하고자 하는 그 것에 집중한다.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부부간의 다툼이나 자녀들간의 사소한 일

직장에서 사업간에 생기는 일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오히려 너무 민감하여서 일어나는 오해도 있다.

조금 모른척 방치시켜 놓아도 해결되었을 만한 일들도 쉽게 넘어가지 않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런 일들은 교회에서 내가 섬겼던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나타난 내 안의 움직임으로 보여진다.

내가 맡아서 감당해야 할 어린심령에 얼마나 민감하게 접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집중이라고 할까

 

어떤 일이 발생되면 그 원인은 오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언젠가 이 일이 발생될 원인점이 있다는 것이다.

원인점이 있을때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관찰을 해 왔느냐에 따라 이런 일들을 해결하는

운영능력이 탁월해 진다고 생각한다.

많은 조심을 통해서 조금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빨리 움직이려다가 아프는 것 보다 좋다는 생각에서다.

 

다비아 샘터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겠다.

너무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몰라라하고 뒤에 물러서고 싶지도 않다.

항상 근접지원을 할 만한 위치에서 우리 공동체를 돕고 싶다는 말이다.

 

어제 서울 샘터교회 예배후에 목사님의 '기꼬?' 공부전에 잠깐 시간을 내었다.

지난 주에 있었던 회중들의 질문에 대한 답 인듯했다.

"나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 특별히 기대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목사님에 대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도 특별히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으셨지요.

"이 모든 것을 우리 모두가 감당하고 풀어야 할 문제이며 숙제라는 생각입니다."...

 

예배후에 모인 회중에서 색깔이 다른 사람은 솔나무 였던것으로 기억한다.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사람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모인 어떤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우리모두의 숙제라도 애써 본인이 감당해야 할 분량의 짐을 몰라라하시면 아니됩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니이기에 자기가 직접문제를 감당하고 답을 쓰셔야 하는데 그 짐은 우리모두의 짐이지만

먼저 목사님 스스로가 풀지 않으면 교회는 점점 어렵고 힘들집니다"

그 질문에 목사님은

"솔나무님이 이야기 하는 것 알고 있어요"

상당부분 긴장하시는 그 모습이 보이 눈에 잡힌다.

 

"목사님, 오늘 전체 예배의 분위기를 알고 계십니까? 보기 좋으신가요?"

그랬더니 또 말씀은

"네,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 어떻게 해 봅시다"

"담임목사인 내가 심방도 하고 서로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후에라도 성도들간에 갈등구조를 어떻게해서라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로 그런일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간단한 질문과 요청을 했다.

 

결국 목사님 역시 이 어려움의 문제의 출발이 어느정도 목사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알고 계신다.

그럼, 우리는 오늘 무엇을 어떻게 되어지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애써

'원래 나는 이런 일들을 잘 못해서요'라고 남들의 이해를 구하셨다.

그런것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우리모두가 여기까지 온것 아닌가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똑같은 일들의 반복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다비아, 오프라인 모임에서 활동을 하던 나의 입장은

교회가 갑작스럽게 태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좋아서 만났던 그 만남이 무언가를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서울 샘터의 출발에 암묵적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우리들의 협력은

오늘 서울샘터의 어색한 결과를 향한 무분별한 협력이 였던 것으로 나는 읽혀진다.

교회의 첫 출발당시

상당부분 서로의 차이를 줄이고자 노력을 했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 오래된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왔으며

새로운 교우들이 멤버가 교체되는 가운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길에 대한 전반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우리 서로간에 늘 있었어야 할 그 소통의 장이 상당부분 축소되어졌으며

오로지 초등하교 어린아이들과 같이 한 사람과의 소통에만 집중한 오늘의 결과라는 생각이다.

속도 조절을 할 수 없는 기능의 미숙함이 오늘 엉킨 우리들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주일 목사님의 설교 내용중에

"오늘 서울샘터가 과거 5년전으로 돌아가봅시다.

5년 전에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 과거에 벌써 시작되었음을 보아야 합니다."라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 나타난 나름의 부족한 모습들의 원인점은 그동안 우리의 갈등과 모순들을

애써 직시하려 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부족한 연합이였다.

당연 건강한 열정으로 서로 힘을 모았던 동료들이 있었고

항상 다른길을 걸어가는 방식으로 솔나무는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 차이를 분명히 바라보게 되면서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조차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심지어 서울오프활동을 같이 햇던 가까운 사람들 조차도 똑같은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취급받는 것에 대한

정확한 표현보다는

아니, 솔나무를 좋아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알고 있으나

솔나무와 같이 매도당하는 것에 대한 자기 보호기능이 더 발동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래도 나의 움직임과 글쓰기 방식에 대한 그동안에 많은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애써 '나는 나의 길을 간다'라고 나의 주장을 펼쳤다.

이자리는 빌어 그런 나의 모습에 힘들어하고 상처가 되었던 주변의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표한다.

단 한가지 말을하자면

견디다가 떠나가는 이들의 마지막 서러움을 만날때마다 지난 아품과 추억을 더듬어 슬픔을 감추는

우리들 각자의 모습에 동의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행동이 나타난 것이다.

근간에 우리에게 일어난 소통의 한계?...

왜 우린 꼭 과거에 조심을 했어야 하는 일에 시간을 놓치고 결과적으로 아품과 상처 앞에서

서로의 선 자리에서 변론하고 주장하고 나의 생각의 울렁거리는 어지럼을 애써 누른다.

"우린 목사님을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러다가 목사님이 서울에서 못하시고 대구로 내려가거나 서울샘터교회가 없어진다면

우리는 다시 또 떠돌아다녀야 하는 것 아니가요. 그러니 우리가 서로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어제까지 우리들의 동료였던 이들의 떠남을 보면서

기존 교회에서 너무나 싫어서

아니, 나역시 그 상황에서의 피해자 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늘 나도 그런 파편들을 사랑했어야 한 동료들에게 사정없이 토설하고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떠난 이들에 대한 예우와 배려

다시 찾아 오더라도 환대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오늘 다비아 서울샘터에서 그 가능성을 보고 싶다.

아쉬움없이 섭섭함 없이 떠날 수 있어야 다시돌아오는 그들...아니 새로 찾아올 새로운 가족들 역시

정말로 행복한 토양에서 꽃피우는 열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한가지 자기들이 서 있는 자라가 어딘지 살펴보라

다비아와 오프, 그리고 대구,서울샘터교회...

정용섭목사님을 둘러 서 있는 그 자리의 반경이 좁으면 좁을수록

샘터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영혼들은 주눅들게 될 것이며

또다시 오늘의 샘터교회가 그토록 지켜 내고자 했던

다른 교회와 우리는 다르다는 그 막연함 속으로 또다시 함몰되고 추락을 할 것이다.

일반모임이나 교회, 그리고 정용섭목사님까지도 아주 탁월하거나 월등한 가치을 품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단지 오늘 우리들의 모임에 남들과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 아닐까

우리들의 출발은 미래의 잠정적 가치(어느 누구로 부터 규정된)향해 목표지향적 걸음을 걸어가고 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더불어 걸어가는 그 걸음은

어찌보면 오합지졸의 행군대열과 같이 아주 엉성해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살아가는 맛이 있는 그런 공동체임이 좋아보이는 것 아닌가

한사람의 누치를 살피는 주변의 날카로움 때문에 우린 어디로 가는지 전혀 길을 잃어버릴 것 같다.

아니 당분간은 기준이 없어서 누구라도 제안하고 협조를 해야 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어찌하나

큰 옷을 줄여 입을 수 있지만

상하지 않고 옷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은 껍질을 날마다 벗어내는 인내를 통해서

멋 있는 샘터가 될 것 아니겠는가

어느누가 이곳을 찾아와도 스며들수 있을 그런 따스한 곳

말은 '오는사람 막지 않고, 떠나는 이 붙잡지 않는 자연스러운 곳?'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로 들려진다.

 

정용섭 목사님을 사랑한다.

그저 조금 멀리서 그렇게 항상 그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누구라도 사랑을 하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들을 할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면서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솔나무는 목사님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섬겨오다가 오늘 만큼 먼 거리에 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어지지 않기위해서 변명을 하거나 어필하고 싶지 않다.

다비아와 샘터를 사랑하시는 열성을 소유한 분들은 바로 당신들의 역할 때문에

오히려 더 행복해야 할 다비아와 샘터가 어색함을 조금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진정으로 인정하는 만큼 샘터의 '터'는 정말 '샘'이 솟는 곳이 되어질 것이다.

그 '샘'은 누구라도 오면 물한 모금 마실 수 있는 것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목사님

조금만 서로의 바램에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땀흘렸던 그 땀들이 스며든 샘터가 될 것이기에

그리고,

목사님의 주변을 그렇게도 보호하고 섬기려고 걸음 걸이가 어색한 그 걸음을 오늘 고치지 못한다면

지나간 시간속에 서로의 '의'만이 무성한 샘터가 될 것입니다.

목사님의 역할 만큼 주변에 목사님을 섬기는 분들의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제가 섬기고 있는 지금의 교회에서도

"나 누구 때문에 교회 생활을 학기 싫다"고 할때 서로에게 다 이해도어지지 않았던 것들이 있음을 알기에

원망하지 않고 이해하며 견뎌가도록 돕고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관계 당사자가 '나'일때 참으로 난감하다.

어떤때는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 6년정도 갈등하며 지나던 기억이 있다.

그 시간들이 지난 후에 "김집사! 그동안 미안했어..."

"아닙니다. 권사님...그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해서 오해할 만 했었어요"...

그런데

오늘 샘터교회의 예배분위기를 볼때에

감정의 골짜기를 빠져 나오는 기술이 부족한 서로에게 너무 많은 원망이 있다.

그 찌꺼기들로 인해서 너무도 많은 자기안의 사연들을 여기에 집중한 결과이다.

필요한 만큼의 사연을 연결해서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주기를 바려며

솔나무를 돌아보는 자리에 있다.

주변에서 서로의 이해가 달라서 소통이  어렵다고 한다.

우리들의 소통은 일반적으로

문제가 일어났을때 그 문제을 제거하는 방식의 소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솔나무의 관점은 그 문제가 생겨나기 이전의 소통하지 못함에 대한 가치로 집중되어있다.

이미 시간을 놓쳐 결과적으로 회복불능상태에서의 소통은 상당부분 폭력적으로 전달된다.

"시험들어 떠났다"

"성도가 목회자를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책임감 있는 답변이 아닌 변명으로 들려지고 읽혀지는 것은

그 문제의 중심에 자기가 없었다는 것인데...울렁증이 생기는 표현들이라는 생각이다.

 

솔나무는 공동체를 떠난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생겨난 그 결과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다시는 이런일들이 발생됨에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한걸음도 협력함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다비아와 오프, 서울샘터에서 이런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현재 솔나무는 떠난자가 아니라 그 안에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진정한 소통을 원해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글이 길어진다.

지금 같이 남들이 보기에 상당히 거칠고 비아양 투의 글쓰기가 아니라 정중하게 글쓰는 것이 어설프다.

진정성이 보여지지 않아다는 말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어찌 되었든지 이제 나도 슬슬 정리를 좀 해야 하겠다.

미련과 아쉬움을 그저 뒤로 돌려 놓고 싶다.

 

서로에게 상처가 아니라 우리는 이런 일들을 통하여서 하늘을 향하는 것 아니겠는가

 

조금더 배려가 되어짐과 환대 받았음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교류하는 곳으로...

 

일반 보편적인 교회에서 맛보지 못하는 참 안식을 누리는 그런 '터'가 되어지기를...

어느누가 내게 간절하게 

"우리 같이 다비아를 훌쩍 떠나 볼까요" 한다.

 

지금도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제목이 있다.

'톰과 제리'

이 둘은 하나님 나라 여행에서 만나 진정한 친구였다.

 

미련없다.

 

좋은 친구들...

 


profile

은빛그림자

July 29, 2009

ㅎㅎㅎㅎㅎ(웃어서 죄송)

아-!!! 이 외롭고도 웃긴 풍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히 제목은 의문문인데 어느 누구 하나 댓글 다는 사람이 없네.

이게 오빠의 현주소라구요.ㅎㅎ

안 그래도 없던 인기, 더 없어졌잖아요. 아놔~~

오빠를 쬐끔 생각해 주는 저조차도 저 긴 글을 다 안 읽었어요..

아, 왜캐 길어요??? 뭐라고 그러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진짜.ㅋ

암튼 제가 엄청나게 바쁜 중에도 댓글 달아 드렸으니 셤 끝나면 삼결살이나 사주세욤!

 

추신 : 솔나무 오빠 때문에 내가 미쳐!ㅎㅎㅎ

 

profile

사띠아

July 30, 2009

 솔나무님.

샘터교회와 다비아에 대한 애정이 줄줄이 묻어 나오는 긴글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 하긴요.

매주 한번의 예배에 심령을 드려야 하겠지요.

지렁이처럼 영적 촉수만 예리하게 들고

다른 것은 다 감고 덮고 감추고 생명의 영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몰라도 너무 모르면서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 한다는 핀잔...

듣자고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솔나무님의 기분이 그래서라도 풀리신다면....

profile

sbw2

August 15, 2009

솔나무님, 샘터교회...

뭔가 冷~~

 

 

 

List of Articles
No. Subject Author Date Views
Notice 사회적거리 유지 기간 온라인예배 임마누엘 Mar 05, 2020 59515
Notice 말씀예전 - 성경봉독 - 에문. 2023.12.10 file 우디 Jan 09, 2018 65516
Notice 서울샘터교회 휘장성화 총정리 file [7] 우디 Jan 04, 2014 131836
Notice 교인나눔터 게시판이 생겼습니다. [2] mm Feb 13, 2012 233827
Notice 2025년 교회력 [1] 우디 Nov 26, 2011 271534
Notice 서울샘터 교회 창립의 변 [123] 정용섭 Oct 24, 2008 353004
187 상담게시판 오픈합니다.. [2] 이길용 Sep 12, 2009 10866
186 샘터교회 게시판에 글쓰기 [4] 박승수 Sep 11, 2009 13092
185 주보 2009년 9월13일, 성령강림절 후 열다섯째 주일 file [3] 우디 Sep 11, 2009 10598
184 9월 샘터산행 공지 [16] 산꾼 Sep 09, 2009 9514
183 어떤 죽음 file [2] 박승수 Sep 09, 2009 10516
182 샘터교회 게시판 변신! [6] 우디 Sep 09, 2009 9964
181 주보 2009년 9월6일, 성령강림절 후 열넷째 주일 file [2] 우디 Sep 04, 2009 10071
180 WCC 총회 한국에서 유치했다고 하네요. [3] 드브니 Sep 01, 2009 9676
179 제가 기독교방송에서 인터뷰를 (당)했습니다. [8] 박승수 Aug 31, 2009 9726
178 김대중대통령의 묘에 다녀왔습니다. file [6] 박승수 Aug 28, 2009 16956
177 주보 2009년 8월30일, 성령강림절 후 열셋째 주일 file [1] 우디 Aug 27, 2009 10326
176 내 마음에 그려놓은 예배당 [4] 박승수 Aug 27, 2009 10415
175 잘 다녀 오셔요~ [12] 은빛그림자 Aug 20, 2009 9688
174 주보 2009년 8월 23일, 성령강림절 후 열둘째 주일 (수련회기간) file [2] 우디 Aug 13, 2009 10890
173 주보 2009년 8월 16일, 성령강림절 후 열한번째 주일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 주일) file [3] 우디 Aug 13, 2009 10125
172 중고등부 모임도 있나요? [3] 김용남형제 Aug 11, 2009 10931
171 주보 2009년 8월 9일, 성령강림절 후 열번째 주일 file [3] 우디 Aug 07, 2009 10291
170 8월 산행 공지 [10] 산꾼 Aug 03, 2009 9590
169 주보 2009년 8월 2일,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file [1] 우디 Jul 31, 2009 10144
» 어떻게 할까요? [3] 솔나무 Jul 28, 2009 9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