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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13
오늘부터 "제3장 계시와 세속 : 본회퍼"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부러 한 주간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칼 바르트까지가 이 책의 ⅓ 정도 분량인데요. 압축하는 능력이 좀
더 상승되면 빨리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실상 계속해서 압축량이 늘어나는 추세~ㅠㅠ)
시간을 가졌습니다.^^ 칼 바르트까지가 이 책의 ⅓ 정도 분량인데요. 압축하는 능력이 좀
더 상승되면 빨리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실상 계속해서 압축량이 늘어나는 추세~ㅠㅠ)
1. 삶과 죽음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제1기 : 1906 ~ 1932년까지. 성장과 신학 훈련의 기간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팔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여동생
자비네(Sabine)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Paula) 쪽으로 19세기 유명한
교회사학자 하제(K. Hase)의 핏줄이고, 아버지(Karl Ludwig)는 정신신경학 의사로서
베를린 대학 교수였습니다. 꽤 지적인 집안에서 수준 높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후 베를린으로 이사 와서는 하르낙, 트뢸치, 웨버 등과 친분을 맺습니다.
자비네(Sabine)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Paula) 쪽으로 19세기 유명한
교회사학자 하제(K. Hase)의 핏줄이고, 아버지(Karl Ludwig)는 정신신경학 의사로서
베를린 대학 교수였습니다. 꽤 지적인 집안에서 수준 높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후 베를린으로 이사 와서는 하르낙, 트뢸치, 웨버 등과 친분을 맺습니다.
1923년 튀빙겐대학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게 됩니다. 1920년대 독일은
바르트를 위시한 변증법적 신학이 많은 관심을 끌던 시기였지만, 아직까지는 자유주의
신학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회퍼가 베를린 대학에서
친분을 쌓은 신학자들은 다이스만, 하르낙, 홀, 제베르크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르낙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군요. 하르낙의
장례식 때 조사를 읽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바르트를 위시한 변증법적 신학이 많은 관심을 끌던 시기였지만, 아직까지는 자유주의
신학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회퍼가 베를린 대학에서
친분을 쌓은 신학자들은 다이스만, 하르낙, 홀, 제베르크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르낙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군요. 하르낙의
장례식 때 조사를 읽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본회퍼가 신학적으로 가장 영향을 받은 신학자는 그가 배운 자유주의 신학 스승들이
아니라, 앞서 다뤘던 칼 바르트였습니다. 이때까지(바르트와 하르낙의 논쟁 후)도
바르트와 그의 변증법적 신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였는데, 1925년 학위논문
"성도의 교제"를 준비하면서 바르트의 저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과 얼마 후
『로마서 강해』등을 읽고 그에게 심취합니다.
아니라, 앞서 다뤘던 칼 바르트였습니다. 이때까지(바르트와 하르낙의 논쟁 후)도
바르트와 그의 변증법적 신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였는데, 1925년 학위논문
"성도의 교제"를 준비하면서 바르트의 저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과 얼마 후
『로마서 강해』등을 읽고 그에게 심취합니다.
1927년 베를린 대학 박사논문 『성도의 교제』로 졸업
1930년 베를린 대학 교수 임용논문 『행위와 존재』로 조직신학 강사임용
제2기 : 1933 ~ 1939년까지. 신학적 응답의 시기
1932년의 독일 서거는 나치가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의 통치자가 됩니다. 본회퍼는 같은 해 2월에 베를린 라디오 방송에서
"젊은 세대의 지도자 상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다가 중도에 중단되고 이때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히틀러는 독일의 통치자가 됩니다. 본회퍼는 같은 해 2월에 베를린 라디오 방송에서
"젊은 세대의 지도자 상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다가 중도에 중단되고 이때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1933년 4월 7일 독일의회의 모든 유대인을 국가 공무원에서 배제시키는 "아리안 입법"을
통과시키고, 독일 교회는 히틀러 정권을 지지하는 "독일 연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본회퍼는 독일교회와 히틀러 정권을 향해 반박성명을 발표하고 "긴급 목사 연맹"
(Pastor's Emergency League)을 위한 초안문인 "베델 고백"을 작성합니다.
통과시키고, 독일 교회는 히틀러 정권을 지지하는 "독일 연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본회퍼는 독일교회와 히틀러 정권을 향해 반박성명을 발표하고 "긴급 목사 연맹"
(Pastor's Emergency League)을 위한 초안문인 "베델 고백"을 작성합니다.
1933년 10월 본회퍼는, 자신이 속한 교회가 아리안 입법을 받아들이자 그 교회에서
목회하기를 거부하고, 시국에 침묵을 지킨 베를린 대학교수직도 휴직, 영국 런던으로
갑니다. 이곳에서 약 3년간 설교와 목회에 전념하는데, 본회퍼의 생애 중 유일한
안정기였다는군요.
목회하기를 거부하고, 시국에 침묵을 지킨 베를린 대학교수직도 휴직, 영국 런던으로
갑니다. 이곳에서 약 3년간 설교와 목회에 전념하는데, 본회퍼의 생애 중 유일한
안정기였다는군요.
런던에 있던 그를 다시 독일로 이끄는 계기를 준 사람은 바르트였습니다. 꾸지람에
가까운 바르트의 편지를 읽고 고민하다가, 1935년 4월 독일로 돌아와 고백교회에
소속된 5개의 목사 후보생 연수원 가운데 하나의 원장직을 맡습니다. 이후 『제자의 길』
『신도의 공동생활』 등을 집필합니다.
가까운 바르트의 편지를 읽고 고민하다가, 1935년 4월 독일로 돌아와 고백교회에
소속된 5개의 목사 후보생 연수원 가운데 하나의 원장직을 맡습니다. 이후 『제자의 길』
『신도의 공동생활』 등을 집필합니다.
제3기 : 1939 ~ 1945년까지. 투쟁과 죽음까지의 시기
1939년 9월 10일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모든 강연, 강의, 저술이 금지되고 행동 하나하나 감시당하는, 사실상 연금 상태인
본회퍼가 이 시기 가장 고심했던 주제가 '윤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1941년에서
1943년 사이에 광범위한 반 나치 지하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모든 강연, 강의, 저술이 금지되고 행동 하나하나 감시당하는, 사실상 연금 상태인
본회퍼가 이 시기 가장 고심했던 주제가 '윤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1941년에서
1943년 사이에 광범위한 반 나치 지하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1942년 독일 지하단체가 계획한 쿠데타 계획과 항복문서가 영국 정부에 의해 거절당하자
히틀러 암살을 계획합니다. 본회퍼는 초기에 주장하던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이 암살계획에
가담하게 됩니다. 1943년 3월까지 두 차례의 암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1943년 4월 5일
오후 본회퍼는 부모의 집에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됩니다.
히틀러 암살을 계획합니다. 본회퍼는 초기에 주장하던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이 암살계획에
가담하게 됩니다. 1943년 3월까지 두 차례의 암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1943년 4월 5일
오후 본회퍼는 부모의 집에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됩니다.
1943년 4월부터 감옥에서 보낸 약 2년간은 신학자 본회퍼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베를린 티겔수용소에서 신학 구상과 저술을 지속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평생의 숙원인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구성을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윤리'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1940년에서 43년 사이에 틈틈이 쓴 글들을 베트게가 모아 본회퍼
사후에 『윤리』(Ethics)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고 합니다.
베를린 티겔수용소에서 신학 구상과 저술을 지속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평생의 숙원인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구성을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윤리'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1940년에서 43년 사이에 틈틈이 쓴 글들을 베트게가 모아 본회퍼
사후에 『윤리』(Ethics)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고 합니다.
1944년 10월 비밀리에 베를린 게슈타포 수용소로 이감, 1945년 2월 부켄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됩니다. 그리고 다시 4월 3일 플로센부르크로 옮겨져 4월 9일 새벽 동이
터올 무렵 교수형을 받습니다. 이때가 연합군이 플로센부르크 수용소를 행방시키기
불과 1주일 전이었고, 히틀러가 자살하기 3주전이었다고 합니다.
수용소로 이송됩니다. 그리고 다시 4월 3일 플로센부르크로 옮겨져 4월 9일 새벽 동이
터올 무렵 교수형을 받습니다. 이때가 연합군이 플로센부르크 수용소를 행방시키기
불과 1주일 전이었고, 히틀러가 자살하기 3주전이었다고 합니다.
[본회퍼의 삶의 모습은 감옥 생활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경건한 생활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적 자세는 다른 죄수와 간수까지 감동시켰다. 그는 철저한 기도생활과 성경묵상을
했고, 다른 죄수들을 위해 예배를 드려 주고 상담과 위로를 해 주었다. 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어두운 시대정신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 그는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의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에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자랑이었다.]
신앙적 자세는 다른 죄수와 간수까지 감동시켰다. 그는 철저한 기도생활과 성경묵상을
했고, 다른 죄수들을 위해 예배를 드려 주고 상담과 위로를 해 주었다. 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어두운 시대정신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 그는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의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에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자랑이었다.]
Barth provided much of the theological foundation upon which 3,000 German pastors stood against Hitler,
many of them at the cost of their very lives. Men like Dietrich Bonheoffer were heavily influenced by Barth.
당시 목사님 총 수가 약 18,000명. 그 중 3,000명만 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거의 생명을 걸고....
오늘의 독일의 저력,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우리가 그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군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가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
many of them at the cost of their very lives. Men like Dietrich Bonheoffer were heavily influenced by Barth.
당시 목사님 총 수가 약 18,000명. 그 중 3,000명만 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거의 생명을 걸고....
오늘의 독일의 저력,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우리가 그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군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가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
신학과 철학, 자연신학 등 판넨베르크의 책을 읽다가 하도 진도가 나가질 않아
다비아 사이트의 정목사님 조직신학을 다시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나마 김 목사님의 현대신학 연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랜 만에 올라와, 무척 반갑습니다. 바로 들어가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