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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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지역 임대교회 목사님께 편지드립니다." 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 서경석 목사
(다른 내용 없음)
신완식 목사님,
프레시안 이대희 기자님이 쓰신 기사는 잘 읽어 보았습니다.
서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이번 기회에 이메일을 한 번 보내 볼 참입니다.
한 가지, 서 목사님이 단편적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분명히 서 목사님은 꾸준하게 '인권 문제'를 외쳐 오셨고,
'인권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수든 진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단편적이시죠.
또는, '윤리적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끔씩 "이거 막나가는 거 아나야?"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21세기 도시화 사회 속에서 성경적 윤리를 실철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행착오도 각오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용산참사를 생각해보면,
성경적 윤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매우 난해부분이 산재해 있습니다.
토지 위에 쌓아올린 건물에 대한 소유 개념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논리적인 관점으로만 따져 보자면, 차라리 중국이 공평한 건물형 토지 소유 개념을 도시화 사회에 적용하고 있지요.
지금의 대한민국 토지법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서 목사님 글을 올린 까닭은,
그런 고민들을 각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진행시키자'는 서경석 목사님의 행동주의적 면모가
이시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올렸습니다.
하여튼, 올려주신 프레시안 기사를 더욱 자세하게 읽어보고 이메일 한 번 보내봐야겠습니다.
프레시안 이대희 기자님이 쓰신 기사는 잘 읽어 보았습니다.
서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이번 기회에 이메일을 한 번 보내 볼 참입니다.
한 가지, 서 목사님이 단편적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분명히 서 목사님은 꾸준하게 '인권 문제'를 외쳐 오셨고,
'인권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수든 진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단편적이시죠.
또는, '윤리적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끔씩 "이거 막나가는 거 아나야?"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21세기 도시화 사회 속에서 성경적 윤리를 실철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행착오도 각오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용산참사를 생각해보면,
성경적 윤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매우 난해부분이 산재해 있습니다.
토지 위에 쌓아올린 건물에 대한 소유 개념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논리적인 관점으로만 따져 보자면, 차라리 중국이 공평한 건물형 토지 소유 개념을 도시화 사회에 적용하고 있지요.
지금의 대한민국 토지법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서 목사님 글을 올린 까닭은,
그런 고민들을 각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진행시키자'는 서경석 목사님의 행동주의적 면모가
이시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올렸습니다.
하여튼, 올려주신 프레시안 기사를 더욱 자세하게 읽어보고 이메일 한 번 보내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그동안 영세세입자들이 힘없이 쫓겨나면서 일부 세입자들이 과격단체인 전철협과 연대했고 그 결과가 이번 용산참사였습니다.' 를 통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시키는 경향이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요ㅤㅅㅔㅍ님에게 하는 말은 아니고요. 글을 보고 아쉬운 마음에 적어봅니다. 서경석 목사에게 하는 말일 수 있겠네요.
전철연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과연 합리적 행동그룹(?)인 임대교회연합체로 갈 수 있을까요?
재개발지역 임대교회 목회자들은 세입자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세입자가 되어서 문제의 본질을
뚫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자립 농촌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하고 문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 임대교회 목회자들의 길이라고 봅니다. 최대한 협상해서 보상금을 먼저 받았으면 미적거리지 말고 생각한 곳으로 떠나고요.
교회는 재개발의 당위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저는 서경석 목사에 대한 호불호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은 염려가 됩니다.
다만 '그동안 영세세입자들이 힘없이 쫓겨나면서 일부 세입자들이 과격단체인 전철협과 연대했고 그 결과가 이번 용산참사였습니다.' 를 통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시키는 경향이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요ㅤㅅㅔㅍ님에게 하는 말은 아니고요. 글을 보고 아쉬운 마음에 적어봅니다. 서경석 목사에게 하는 말일 수 있겠네요.
전철연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과연 합리적 행동그룹(?)인 임대교회연합체로 갈 수 있을까요?
재개발지역 임대교회 목회자들은 세입자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세입자가 되어서 문제의 본질을
뚫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자립 농촌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하고 문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 임대교회 목회자들의 길이라고 봅니다. 최대한 협상해서 보상금을 먼저 받았으면 미적거리지 말고 생각한 곳으로 떠나고요.
교회는 재개발의 당위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저는 서경석 목사에 대한 호불호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은 염려가 됩니다.
김영진 목사님(블로그에 들렸었는데 목사님인듯 싶어서 그냥 목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임대교회가 영세(零細)세입자들과 함께 도시화된 생활-공동체를 이루면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사회의 경제는 자본주의로 돌아가야 하고, 교회의 경제는 공동체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재의 임대교회 목회자들이 영세 서민들이 기반을 준비하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더불어 사는 생활-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목회자들이나 영세민들 모두 공동체생활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겠죠.
어릴때 저는 서울시 성동구 송정동에 살았었는데, 그곳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김진홍 목사님의 예는 본받을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김진홍 목사님이 송정동을 떠나신 이후로 뚝섬 인근에 새로운 판자촌이 생겼지만, 송정동-뚝방 판자촌 주민들 상당 수가 판자촌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에 있는 저로써는 두레교회 목회와 두레공동체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송정동에서 기반을 닦아서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큰 공장 여러 개를 운영하고 계시는 장로님 한분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미자립 농촌교회는 조금 다른 상황이겠지만, 길드-사회주의 개념을 공동체신학적인 관점에서 소화해낸 현대의 몇몇 베네딕트회 공동체들의 예를 잘 사용한다면 우리나라 농촌사회에서의 목회에 있어서도 상생의 방법은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임대교회가 영세(零細)세입자들과 함께 도시화된 생활-공동체를 이루면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사회의 경제는 자본주의로 돌아가야 하고, 교회의 경제는 공동체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재의 임대교회 목회자들이 영세 서민들이 기반을 준비하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더불어 사는 생활-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목회자들이나 영세민들 모두 공동체생활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겠죠.
어릴때 저는 서울시 성동구 송정동에 살았었는데, 그곳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김진홍 목사님의 예는 본받을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김진홍 목사님이 송정동을 떠나신 이후로 뚝섬 인근에 새로운 판자촌이 생겼지만, 송정동-뚝방 판자촌 주민들 상당 수가 판자촌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에 있는 저로써는 두레교회 목회와 두레공동체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송정동에서 기반을 닦아서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큰 공장 여러 개를 운영하고 계시는 장로님 한분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미자립 농촌교회는 조금 다른 상황이겠지만, 길드-사회주의 개념을 공동체신학적인 관점에서 소화해낸 현대의 몇몇 베네딕트회 공동체들의 예를 잘 사용한다면 우리나라 농촌사회에서의 목회에 있어서도 상생의 방법은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월광 님의 댓글을 읽다보니 제가 올린 글이 그렇게 이해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우선, 제가 올린 댓글 내용과 서경석 목사님의 본글 내용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聖과 俗을 분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굳이 제 말의 이론적인 근거를 찾자면, 폴 티리히가 말했던 "Individualization and Participation"의 균형을 "경제적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 식견이 부족하기에 표현법이 억지스럽고 다듬어지지 않았음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자본주의가 최선 또는 차선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월광님의 물음에 대해서: 네, 맞습니다!!
지난해 말, 백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께서도 주일설교 도중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취약점에 대하여 언급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자본주의의 근본정신과 계속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경제이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 미국에서 구현되고 있는 자본주의는 그 근본정신을 잃어버렸죠.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현재 미국이나 한국의 자본주의 원리에는 성경적인 토지-경제론이 빠져있습니다. 시장경제 체제, 금융관리 체제, 사회복지 체제 등등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토지 소유 개념에 매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미국이나 한국의 자본주의 원리 안에는 헨리 죠지가 말한 토지공개념과 같은 성경적 토지 소유 및 관리 개념이 상실되어 있는 "천민-자본주의"(Max Weber)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는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근본정신과 성경적인 원리를 회복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제가 올린 댓글 내용과 서경석 목사님의 본글 내용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聖과 俗을 분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굳이 제 말의 이론적인 근거를 찾자면, 폴 티리히가 말했던 "Individualization and Participation"의 균형을 "경제적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 식견이 부족하기에 표현법이 억지스럽고 다듬어지지 않았음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자본주의가 최선 또는 차선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월광님의 물음에 대해서: 네, 맞습니다!!
지난해 말, 백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께서도 주일설교 도중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취약점에 대하여 언급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자본주의의 근본정신과 계속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경제이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 미국에서 구현되고 있는 자본주의는 그 근본정신을 잃어버렸죠.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현재 미국이나 한국의 자본주의 원리에는 성경적인 토지-경제론이 빠져있습니다. 시장경제 체제, 금융관리 체제, 사회복지 체제 등등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토지 소유 개념에 매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미국이나 한국의 자본주의 원리 안에는 헨리 죠지가 말한 토지공개념과 같은 성경적 토지 소유 및 관리 개념이 상실되어 있는 "천민-자본주의"(Max Weber)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는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근본정신과 성경적인 원리를 회복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월광 님의 질문에 댓글 수준의 짧은 대답을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대답을 들으셔야겠다면, "개신교 윤리"가 아니겠습니까?
막스 베버의 책 제목에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zm) 이 책을, Stephen Kalberg라는 분에 의해서 영어로 번역되고 부분적인 요점이 정리된 Roxbury Edition으로 읽어 보신다면 이해하시기가 더 쉬우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헨리 죠지의 토지공개념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http://land.kimc.net/study_2.htm을 확인해보세요.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같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가르침과, 토지를 소유하는 개념에서부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순전한 예배 정신이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경제적 현실에서도 회복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본래의 정신 역시 마찬가지죠. 단순히 경쟁적인 시장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자유로운 상호존중과 평화적 상생의 방법이 바로 자본주의의 근본정신이 말하고 있는 관계성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대답을 들으셔야겠다면, "개신교 윤리"가 아니겠습니까?
막스 베버의 책 제목에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zm) 이 책을, Stephen Kalberg라는 분에 의해서 영어로 번역되고 부분적인 요점이 정리된 Roxbury Edition으로 읽어 보신다면 이해하시기가 더 쉬우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헨리 죠지의 토지공개념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http://land.kimc.net/study_2.htm을 확인해보세요.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같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가르침과, 토지를 소유하는 개념에서부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순전한 예배 정신이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경제적 현실에서도 회복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본래의 정신 역시 마찬가지죠. 단순히 경쟁적인 시장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자유로운 상호존중과 평화적 상생의 방법이 바로 자본주의의 근본정신이 말하고 있는 관계성이라는 뜻입니다.
용산참사를 전철연의 과격행동에 책임을 두는 쪽과 세입자의 편에 서자는 쪽. 제가 봤을 땐 참 괴리가 큰데,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핵심은 김목사님말씀따나 임대교회목회자와 세입자가 '분리'되는 것이 아닌데, 서경석(목사)님의 전제는 또 다르군요.
또 과연 공동체생활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문제의 본질은 기존의 영세 서민들을 '부당'하게 내모는 (재개발) 시스템에서 찾아야지, 길드식의 공동체가 이 상황에 적합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덧. 저 간담회에서 분명 기.사의 '정치(신학?)색'이 풍겨나올 것이라는 건 좀 삐딱한 예측이죠?
또 과연 공동체생활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문제의 본질은 기존의 영세 서민들을 '부당'하게 내모는 (재개발) 시스템에서 찾아야지, 길드식의 공동체가 이 상황에 적합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덧. 저 간담회에서 분명 기.사의 '정치(신학?)색'이 풍겨나올 것이라는 건 좀 삐딱한 예측이죠?
차성훈 선생님, 아래 링크시켜놓은 글을 읽어보세요.
"재개발구역 철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http://www.chogabje.com/board/column/view.asp?C_IDX=26328&C_CC=BC
철거민들의 어려움의 본질은 '부당'한 재개발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건물공간 임대(Rent)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철거민들이 재개발구역에서 구지 버티고 있어야할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오랜 고향 땅을 지키고자 재개발을 반대하는 문제와, 이번 문제는 조금 다른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조금더 낳은 임대 조건을 제시하는 건물주가 있다면 얼마든지 옮겨야죠.
제가 임대교회가 주도하는 생활-공동체를 대안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는 영세-서민들을 위한 생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이해하고 있는 영세-서민들이라는 개념과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는 영세-서민들이라는 개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듯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살던 송정동 뚝방 판자촌 극빈층의 사정과 이번 철거민들의 사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재개발구역 철거 문제와 관련해서 "길드식 공동체"를 대안으로 말한적이 없는데요.
길드-사회주의의 방법론을 성경적으로 잘 소화해낸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베네득트회 농장이 있기에 소개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길드식 공동체"가, 농촌이든 도심지이든,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개발구역 철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http://www.chogabje.com/board/column/view.asp?C_IDX=26328&C_CC=BC
철거민들의 어려움의 본질은 '부당'한 재개발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건물공간 임대(Rent)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철거민들이 재개발구역에서 구지 버티고 있어야할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오랜 고향 땅을 지키고자 재개발을 반대하는 문제와, 이번 문제는 조금 다른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조금더 낳은 임대 조건을 제시하는 건물주가 있다면 얼마든지 옮겨야죠.
제가 임대교회가 주도하는 생활-공동체를 대안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는 영세-서민들을 위한 생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이해하고 있는 영세-서민들이라는 개념과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는 영세-서민들이라는 개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듯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살던 송정동 뚝방 판자촌 극빈층의 사정과 이번 철거민들의 사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재개발구역 철거 문제와 관련해서 "길드식 공동체"를 대안으로 말한적이 없는데요.
길드-사회주의의 방법론을 성경적으로 잘 소화해낸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베네득트회 농장이 있기에 소개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길드식 공동체"가, 농촌이든 도심지이든,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여기에 쓰겠습니다...
임대교회가 주도하는 생활-공동체가 되려면 함께 살겠다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임대교회의 모습은, 목회자들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재개발구역 철거 문제와 관련해서 임대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경석 목사의 제안은 차성훈님의 덧붙인 글처럼 오해의 소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미 제안서에 일정한 가르기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요ㅤㅅㅔㅍ님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개념과 사정의 차이가 있습니다.
요ㅤㅅㅔㅍ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아니라
서경석 목사의 제안에 대한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댓글에 달아 주신 글에는 제가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도 꿈꾸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공동체에 대한 좋은 글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관련 기사링크를 타보니까 읽을 수 없네요;;;; 뭐 대충 사이트만 봐도 무슨 소리 하려는 지는 알겠지만...
과연 이번 일이 임대시스템의 문제일까요? 임대 조건을 제시하는 건물주가 있다고해도 세입자들이 얼마든지 옮겨야한다는 것은 용산 상황의 문제와는 핀트가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번 문제는 조건을 협상하고, 보상하기 위한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세입자들의 고통을 생각해볼 문제구요. 뭐, 길드얘기를 꺼낸 것은 재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측이 서민들을 위한 배려 자체를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 상하지 않으셨음 좋겠군요.
덧. 논의 진행을 보니까, 서로 제시하는 자료 매체가 영 다르네요;;;; 프레시안과 조갑제라... 이 간극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 전 용산참사를 다룬 어제 SBS '그것이 알고싶다'정도 수준이라면 좋겠는데...
과연 이번 일이 임대시스템의 문제일까요? 임대 조건을 제시하는 건물주가 있다고해도 세입자들이 얼마든지 옮겨야한다는 것은 용산 상황의 문제와는 핀트가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번 문제는 조건을 협상하고, 보상하기 위한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세입자들의 고통을 생각해볼 문제구요. 뭐, 길드얘기를 꺼낸 것은 재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측이 서민들을 위한 배려 자체를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 상하지 않으셨음 좋겠군요.
덧. 논의 진행을 보니까, 서로 제시하는 자료 매체가 영 다르네요;;;; 프레시안과 조갑제라... 이 간극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 전 용산참사를 다룬 어제 SBS '그것이 알고싶다'정도 수준이라면 좋겠는데...
2월1일에 서경석 목사님이 전하신 주일설교 전문입니다.
http://www.suhkyungsuk.pe.kr/bbs/view.php?id=colum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74
본문에 대한 해석 보다는 이미 잘 알고있는 성경구절의 의미를 짧게 상기시키고,
곧장 현실 -사건의 본질을 분석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설교입니다.
http://www.suhkyungsuk.pe.kr/bbs/view.php?id=colum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74
본문에 대한 해석 보다는 이미 잘 알고있는 성경구절의 의미를 짧게 상기시키고,
곧장 현실 -사건의 본질을 분석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설교입니다.
왜 다비아에 이런 쓰레기같은 설교를 보라고 올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이건 순전히 제 개인의 생각이지 다른 다비안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요셒님의 정체성을 떠올리는 초록은 동색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위 서경석목사의 설교를 보고 은혜를 받으라는 것인지 혹시 나같은 사람 정신차리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여.
바다건너 살기에 이땅의 현실을 잘 모르면 아는체를 하지나 말던지 죽은 사람 두 번 죽이는 저런 글을 설교라고 하고 있는 목사나 그 설교를 다 같이 읽어라고 하는 사람이나 매 한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혹시 위 설교를 보고 다른 사람들 열 더 받으라고 올리신 것은 아니죠?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요셒님의 정체성을 떠올리는 초록은 동색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위 서경석목사의 설교를 보고 은혜를 받으라는 것인지 혹시 나같은 사람 정신차리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여.
바다건너 살기에 이땅의 현실을 잘 모르면 아는체를 하지나 말던지 죽은 사람 두 번 죽이는 저런 글을 설교라고 하고 있는 목사나 그 설교를 다 같이 읽어라고 하는 사람이나 매 한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혹시 위 설교를 보고 다른 사람들 열 더 받으라고 올리신 것은 아니죠?
설교 본문 읽어보았습니다.
뭐, 저와 서경석 목사(님), 그리고 요세ㅍ님의 입장 차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각자의 생각, 각자의 신학이 있겠지요....전 열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결론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제 열매는 사과맛이었음 좋겠는데...
개인적으로 당황스러운 것은 본회퍼의 그 유명한 '미친 버스기사 끌어내리기(트럭이 아니라 버스로 알고 있었는데요;;)'가 서경석 목사(님)의 설교에서 인용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저거 아마 작년 여름께부터 유명한 레퍼토리였는데요...서경석 목사(님)는 그 레퍼토리가 2008, 2009년 한국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긴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러니군요.
뭐, 저와 서경석 목사(님), 그리고 요세ㅍ님의 입장 차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각자의 생각, 각자의 신학이 있겠지요....전 열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결론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제 열매는 사과맛이었음 좋겠는데...
개인적으로 당황스러운 것은 본회퍼의 그 유명한 '미친 버스기사 끌어내리기(트럭이 아니라 버스로 알고 있었는데요;;)'가 서경석 목사(님)의 설교에서 인용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저거 아마 작년 여름께부터 유명한 레퍼토리였는데요...서경석 목사(님)는 그 레퍼토리가 2008, 2009년 한국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긴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러니군요.
네, 차성훈 선생님. 각자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본회퍼 목사님과 동시대에 프랑스 출신 여류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라는 분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반대하셨죠. 유대계 프랑스인이면서 가톨릭 신자이셨던 시몬느 베이유 선생은 투쟁 방법으로 무기한 금식을 선택하셨고, 실제로 금식투쟁 도중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몬느 베이유 선생은 "사랑은 곧 거리감"(중력과 은혜)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 즉 "거리감"을 인식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서경석 목사님은 본회퍼 목사님의 행동주의적 실천력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동"의 신학과 "행위"의 신학, 현대의 개신교는 이 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서경석 목사님의 이와같은 촉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회퍼 목사님과 동시대에 프랑스 출신 여류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라는 분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반대하셨죠. 유대계 프랑스인이면서 가톨릭 신자이셨던 시몬느 베이유 선생은 투쟁 방법으로 무기한 금식을 선택하셨고, 실제로 금식투쟁 도중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몬느 베이유 선생은 "사랑은 곧 거리감"(중력과 은혜)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 즉 "거리감"을 인식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서경석 목사님은 본회퍼 목사님의 행동주의적 실천력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동"의 신학과 "행위"의 신학, 현대의 개신교는 이 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서경석 목사님의 이와같은 촉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회퍼의 저 '미친 기사 끌어내버리자'의 본질은 단순히 기도뿐만이 아니라 행동하자! 가 아닌 뚜렷한 의도가 있던 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물론 서경석 목사(님)의 의도를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레토릭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요즘 젊은(...) 용어로 저런 식의 실수는 '팀킬(team kill)'이라 합니다아....
덧. 위에서 언급하신 요세ㅍ님의 경제에 대한 '관점'에는 저도 상당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실효성은 생각해봐야 하지만 헨리조지식의 토지 정의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공감하구요. 아이러니한건, 서경석 목사(님)이나 소위 집권층이 바로 그 헨리 조지식의 토지 정의와 같은 맥락의 많은 정책(예를 들면 종부세라든지, 블라블라)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층이라는 것이죠. 이래서 전 괴리감을 느낍니다, 괴리감.
덧둘. '선생님' 안 붙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세ㅍ님에 비하면 전 아직 연배가 한참 아래라;;; 선생님 호칭이 불편하네요; 그냥 '님'만으로 족합니다
덧. 위에서 언급하신 요세ㅍ님의 경제에 대한 '관점'에는 저도 상당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실효성은 생각해봐야 하지만 헨리조지식의 토지 정의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공감하구요. 아이러니한건, 서경석 목사(님)이나 소위 집권층이 바로 그 헨리 조지식의 토지 정의와 같은 맥락의 많은 정책(예를 들면 종부세라든지, 블라블라)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층이라는 것이죠. 이래서 전 괴리감을 느낍니다, 괴리감.
덧둘. '선생님' 안 붙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세ㅍ님에 비하면 전 아직 연배가 한참 아래라;;; 선생님 호칭이 불편하네요; 그냥 '님'만으로 족합니다
"팀킬"이라! '요즘 젊은'(?) 용어 하나 배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불편하시다니 그냥 '님'자만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석 목사님이 예화로 본회퍼 목사님의 이야기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팀킬'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차성훈 님의 관점을 존중하며 저 역시 '그다지 정확한 예화는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목사님의 본글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그 예화의 역할은 충분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서 목사님의 설교가 설교학적으로 훌륭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서적 원리와 정신이 살아있는 자본주의와 토지경제이념의 시작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트의 수도-공동체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싶지만, 참된 자본주의 정신과 공동체신학을 제가 두서 없이 연결짓고 있는 이유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역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개신교의 모체격인 중세시대 개혁운동 역시 베네딕트 정신의 회복에 그 목표가 있었다는 기독교 역사학자(Justo L. Gonzalez)도 있습니다.
서경석 목사님이나 집권층이 죠지이즘이나 국가차원의 적극적인 토지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사려됩니다. 조금더 지켜보면 어떨까요? 최근에 일고있는 "에너지" 문제도 있고, 외국기업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투자유치 감소현상 문제도 있고, ... 등등, 앞으로 단계별로 진행해 나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외국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개방하고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땅값은 내리고 임대의 안전성을 위해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주의에서의 토지개념과는 구분되어야 하지요. 이제 한번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권이(특별히 국토해양부) 규제개혁과제와 개선계획, 현황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른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번 용산참사는 정부에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불편하시다니 그냥 '님'자만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석 목사님이 예화로 본회퍼 목사님의 이야기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팀킬'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차성훈 님의 관점을 존중하며 저 역시 '그다지 정확한 예화는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목사님의 본글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그 예화의 역할은 충분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서 목사님의 설교가 설교학적으로 훌륭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서적 원리와 정신이 살아있는 자본주의와 토지경제이념의 시작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트의 수도-공동체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싶지만, 참된 자본주의 정신과 공동체신학을 제가 두서 없이 연결짓고 있는 이유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역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개신교의 모체격인 중세시대 개혁운동 역시 베네딕트 정신의 회복에 그 목표가 있었다는 기독교 역사학자(Justo L. Gonzalez)도 있습니다.
서경석 목사님이나 집권층이 죠지이즘이나 국가차원의 적극적인 토지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사려됩니다. 조금더 지켜보면 어떨까요? 최근에 일고있는 "에너지" 문제도 있고, 외국기업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투자유치 감소현상 문제도 있고, ... 등등, 앞으로 단계별로 진행해 나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외국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개방하고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땅값은 내리고 임대의 안전성을 위해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주의에서의 토지개념과는 구분되어야 하지요. 이제 한번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권이(특별히 국토해양부) 규제개혁과제와 개선계획, 현황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른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번 용산참사는 정부에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도 제발 우리 이대통령이 제 정신차리고 죠지이즘이건 무엇이건 '제대로된'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런다면 순도 100% 이대통령 안티인 저도 그를 칭찬해줄 수 있겠죠.
다만, 작금의 상황, 그리고 그들이 추진하려고 하는 정책들을 유심히 지켜본다면 죠지이즘, 그리고 요세ㅍ님이 지지하시는 방식의 개혁,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정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지향하는 방향 자체가 정반대이거든요... 그래서 그 욕을 먹는 중인데 그것도 무시하고;;; 땅값을 내리긴 커녕 땅놀이하려고 전국토에 삽질하는 중인걸요...
바다건너 요세ㅍ님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평안하시길...
다만, 작금의 상황, 그리고 그들이 추진하려고 하는 정책들을 유심히 지켜본다면 죠지이즘, 그리고 요세ㅍ님이 지지하시는 방식의 개혁,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정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지향하는 방향 자체가 정반대이거든요... 그래서 그 욕을 먹는 중인데 그것도 무시하고;;; 땅값을 내리긴 커녕 땅놀이하려고 전국토에 삽질하는 중인걸요...
바다건너 요세ㅍ님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평안하시길...
네, 차성훈 님. 바다 건너에서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금강산에서 非命에 가신 故박왕자씨 사건은 어떻게 진전이 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아무리 북한이라지만 정조준 사격을 받아 사망한 그야말로 분명한 과잉 대응이었는데 어떻게 이처럼 소리소문 없이 잊혀져질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용산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 이 간격이 새삼 두렵기까지 합니다.
Open Doors에서 지난 2월3일에 발표한 '세계 기독교 박해 지수' 보고 내용에 의하면 북한이 7년째 세계에게 기독교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핍박하는 최악의 박해국이라고 합니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supress_christian-02032009160754.html)
대한민국의 헌법은 할라산에서 백두산까지의 모든 백성들의 인권과 생명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지금도 북한에서는 용산 참사의 몇 십배 아니 몇 백배의 大학살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 기도의 마음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님들이 쉴 틈도 없이 고난받고 있는 강제 노동수용소로 향하게 됩니다.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샬롬.
그나저나 금강산에서 非命에 가신 故박왕자씨 사건은 어떻게 진전이 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아무리 북한이라지만 정조준 사격을 받아 사망한 그야말로 분명한 과잉 대응이었는데 어떻게 이처럼 소리소문 없이 잊혀져질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용산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 이 간격이 새삼 두렵기까지 합니다.
Open Doors에서 지난 2월3일에 발표한 '세계 기독교 박해 지수' 보고 내용에 의하면 북한이 7년째 세계에게 기독교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핍박하는 최악의 박해국이라고 합니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supress_christian-02032009160754.html)
대한민국의 헌법은 할라산에서 백두산까지의 모든 백성들의 인권과 생명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지금도 북한에서는 용산 참사의 몇 십배 아니 몇 백배의 大학살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 기도의 마음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님들이 쉴 틈도 없이 고난받고 있는 강제 노동수용소로 향하게 됩니다.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샬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30145409§ion=02
서목사님은 한 때 참 좋은 분이셨는데 갈수록 생각이 단편적이 되어 가시는 것 같군요.
철거민들에 대한 깊은 성찰없이 표현하는 내용들이 그들을 두 번 세 번 절망케 만들 것 같습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고 과격한 안티 기독교도들이 되고 있는지 아시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