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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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정도 전,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전날 늦잠을 잔 덕에 부랴부랴 교회 갈 채비를 마치고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752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빈 자리에 앉아 나란히 옆에 서서 걸쭉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아줌마, 아저씨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벅꾸벅 졸던 저는 하마터면 정류장을 놓칠 뻔했습니다. 줄줄이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뒤를 따라 가까스로 카드를 찍고 내리려는 저를 누군가 불렀습니다. “XX 오빠!”
누군가 싶어 고개를 훡 돌려 바라보니 출구 바로 옆 2인석에 앉아 환한 얼굴로 오른손을 흔드는 그녀는 전에 다니던 교회 동생 XXX였습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해, 그녀의 일가족이 제가 다니는 교회로 옮겨오면서부터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교회 집사님이면서 중요한 책무를 하셨고(후에 장로님이 되셨죠), 그녀의 어머니도 교회 집사이면서 중고등부교사(제가 속한 반 담임 선생님을 몇 번이나 하셨죠) , 그녀의 큰 언니는 우리 집 둘째 누나와 동갑, 그녀의 둘째 언니는 저와 동갑, 그녀의 오빠는 저보다 두 살 어린 친한 동생, 그녀는 저보다 네 살 어렸죠. 조그마한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얽히고설킨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서로 알고 지냈지만 그리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귀여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미성년자 간에 이성교제가 활발하지 않은 시절이었고, 또 제 소심한 성격 탓도 있겠죠. 또 너무 가족들끼리 잘 아는 사이이다 보니 후환이 두렵기도 했고요. 그래도 가끔 저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그녀가 기특했고, 저도 은연중에 호감을 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저 말 몇 마디 수준이었기에 별다른 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요.
세월이 흘러 저는 고3을 핑계로 교회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그녀와도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거나 하면 꼭 교회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교회를 등안시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들어가서는 세상의 문화에 더욱 빠져들면서 더욱 교회를 멀리 했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다시 교회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를 떠올렸죠. 집 떠난 탕아를 기다리는 시골 처녀(?) 그 정도의 이미지였던 거 같습니다. 사실 아무런 증거도 없었는데 이러한 상상을 하는 게 남사스럽기는 했죠. ^^
그러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수능을 보기 100일 전 일이었습니다. 몇 주 전 제가 수능 백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고 물었더니 방석을 받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건 고백인 건가? 싶어 친구 녀석에게 물어봤더니, 확실하다고 꼭 잡으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앞에 말한 이유들도 있고, 제 스스로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 었습니다. 그녀를 정말 좋아하긴 하는 건지, 여러 가지 악조건을 뚫고서 만남을 지속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미키 마우스 방석을 그녀에게 사주긴 했지만,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고. 수능 보기 며칠 전, 그녀는 저에게 제가 다니는 학교에 꼭 가고 싶다는 뉴앙스의 말을 했지만 수능을 잘 보지 못해 두 정거장 떨어진 여대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그렇다고 제가 좋은 대학 나왔다는 말은 아닙니다. ㅡ.ㅡ;)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그렇게 아는 교회 오빠, 동생 그 이상이 아닌,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흘러가고 있었고, 저도 이 교회 저 교회 기웃거리다 어머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몇 달에 한 번 교회에 가서 성가대석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구경하다 예배가 끝나면 부리나케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 아버지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하나의 계기가 생겼습니다. 교회 사람들과 주일날 장례식 추도예배에 온 그녀는 상주를 하고 있던 제 손을 꼭 잡으면서 ‘오빠 힘내요. 기도할게요.’라고 했죠.
사실 보상문제 때문에 7일이나 계속된 장례식 중에 들은 말 중 가장 가슴 뭉클한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더 들어가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의 말은 저로 하여금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다가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에 연락을 했죠.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의례적인 답변일 뿐.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도 못하고 속을 태우다가 메일을 보내 확인해 본 그녀의 감정은, 그저 편한 오빠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충격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하긴 제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이길 바라는 것조차가 우스운 일이죠. 별다른 계기도 없었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것도 아니고, 멋진 고백을 했던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나름 충격이 컸던지라 이후로 저는 심각한 착각공포증에 빠졌고... 이것은 제가 연애를 전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그 후에도 그녀를 몇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집은 우리 집에서 버스 타고 두 정거장 거리거든요. 한 번은 평일 오후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데, 선글라스를 낀 덩치 좋은 아줌마(?)가 선글라스를 벗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더군요. 너무 변한 모습에 놀라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졌습니다.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했지만 결혼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고시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렇게 됐나 생각하면서도(법대생이었습니다) 좀 씁쓸하더군요.
그리고 바로 한 달 전 버스 안에서 이제는 서른 살이 된 그녀의 인사를 다시 받았습니다.
예의 그 환하고 호의 넘치는 미소로요. 이번에도 너무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답례도 못하고 버스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가끔 그녀가 제게 보여준 호의가 무엇일까 궁금할 때가 있었습니다. 선천적으로 누구에게나 잘 대해주는 사람인데, 그걸 내가 오해한 것이로구나 하고 추측할 뿐인데요. 아마 그렇겠죠?^^ 단지 그녀에게 투영했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 중엔, 제가 한국교회에 품고 있던 미련과 애증 등이 있던 것이 아닐까 합리화를 해 봅니다. 교회로 돌아가 그동안의 생활을 회개하고 열성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 그녀와 교제하면 나의 인생은 정말 바로 설 것이다!라는 식의 시나리오를 그려놓고 있었던 거지요. 물론 이런 환상은 이후에도 다른 상황을 통해 여러 번 깨졌고 세월이 흘러 저는 이제 노총각 소리 들을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제는 서른 살이 된 그녀의 얼굴을 다시 접하고, 왜 저 친구는 아직도 나를 보면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저렇게 환하게 웃는 것일까 궁금해하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서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천진난만한 그녀의 미소, 저는 그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썼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좁게는 제가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의 이미지를 투영하려고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헛된 망상이었을 뿐이고요. 현재로선 제 개인적인 삶은 그 나름대로의 삶이고, 교회 생활은 교회 생활일 뿐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합치시켜 주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겠지요. 흔히 말하는 구원의 천사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어찌됐든 앞으로 제 신앙생활의 목표는 스스로 그 둘을 합치시키는 것일 겁니다. 그래도 그렇게 소중한 추억을 주셨음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는다 해도... 혹은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해도, 계속 기억에 남을 미소를 보여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그녀가 그 미소를 쭈욱 간직하길 기도합니다..
추신:출판 기념회 가고 싶었는데요.
교회에서 청년부끼리 남산 트레킹을 가는 바람에 너무 피곤하기도 했고,
공짜밥, 공짜책만 너무 밝히는 거 같아... 염치 없어 못 갔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아직 저의 봄은 멀고...(회사를 관두게 됐습니다. ㅡ.ㅡ;)
고난의 여름은 가깝네요.
처음엔 잔뜩 기대를 품게 했다가
중간엔 맥이 탁 풀리고
막판엔 다시금 따뜻한 위안을 전해 주는 글이군요 ^^*
체면 고려치 마시고 출판기념회 오시지 그러셨어요~
5월에 봄 소풍때는 꼭 뵈었음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