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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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속한 모임에서 함께 나눌 글을 이 곳에도 한번 올려봅니다. 급하게 쓴 것이라 정교한 글도, 창조적인 글도 아니지만 여러 분들의 사유와 실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용기를 내어 올려봅니다. 다소 길고, 행간의 비약도 심함을 양해하면서 읽어 주세요. 데리다의 사유에서 도움을 얻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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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상속에 대하여(노무현을 어떻게 애도하고 노무현 정신을 어떻게 상속할까.)
노제에서 햄릿을 생각하다
두 팔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뜨거웠던 서울 광장의 노제는 역설적일만큼 차가운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슬픔이 무엇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질문해보다가 나 역시 속절없는 슬픔에 눈물을 훔친다. 이것이 다른 형태의 파시즘적 감정이지 않을까 하다가도 ‘민주주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이 눈물의 성분과 빛깔, 온도는 정확히 저 지난해 망월동에서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망월동 구묘역의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들 앞에서 나는 ‘마른 뼈’에 불과했음을 인정하고 생기로 소생되기를 희망했던 것처럼, 노무현이라는 죽은/산 예언자가 마른 뼈를 향해 외치는 명령의 목소리를 나는 들었다.
한데 쉴새도 없이 외쳐지는 ‘노무현 정신’은 어딘가 공허하지 않은가. 우리는 언제 한번 ‘노무현 정신’을 정식화했던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노무현 정신’이라는 것은 어떤 정식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정신의 본래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나는 햄릿의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는데, 죽은 선군의 정신을 ‘상속’하는 햄릿의 ‘애도’는 ‘노무현 정신’을 ‘상속’하고자 하며 ‘애도’하는 우리에게 어떤 빛을 던져줄수도 있지 않을까. 도대체 ‘노무현 정신’의 상속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노제에서의 그 같은 차갑디 차가운 깊고 슬픈 ‘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상속의 조건
무엇인가를 상속한다는 것의 진정한 조건은 실패한 애도가 아닐까. 결단코 성공한 애도를 통해서는 상속이 될 수는 없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Trauer und Melancholia>(1917)에서 애도작업을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리비도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상적인 애도작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되면 자아는 상실된 대상을 자기 자신 일부분의 상실로 여기게 되어 우울증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상적인 애도작업이 수행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놓여 있다. 데리다는 애도작업의 의의는 본질적으로 타자를 상징적, 이상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곧 타자를 자아의 상징 구조 안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소위 정상적 애도, 성공적인 애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심각한 폭력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데리다가 보기에 애도가 타자에 대한 존중, 타자에 대한 충실한 기억을 목표로 하는 이상, 정상적 애도는 실패한 애도, 불충실한 애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리비도를 대상과 분리시키지 못한(제대로 납골하지 못한) 실패한 애도가 된다면 타자의 ‘온전한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성공한 애도, 충실한 애도가 되는 것인가. 데리다는 이 역시 충실한 애도일 수 없다고 본다. 자아 내부에 타자가 타자 그 자체로서 충실하게 보존되면 될수록 이 타자는 자아로부터 분리된 채 자아와 아무런 연관성 없이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앞서의 성공한 애도보다 더욱 폭력적으로 타자를 자아와의 관계에서 배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애도의 필연성 및 불가능성이라는 역설, 이중구속이 드러났다.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아나 주체,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자아, 주체 우리는 항상 타자와의 연관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 애도라는 관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실패한 애도라는 관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와의 완전한 합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아, 주체의 존재가 항상 이미 타자의 존재, 타자에 대한 애도를 전제한다면 중요한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 타자와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만 남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에 대한 광범위한 애도 작업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우리가 노무현의 노무현됨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노무현에 대한 애도작업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그를 향한 리비도를 제거할 수도, 계속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에 이제 우리는 죽은 노무현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롭게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햄릿이 죽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의 정의를 ‘복수’로 생각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죽은 아버지, 다시 말해 선왕의 유령이 이제 햄릿에게 명령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죽은 아버지는 복수를 명령했는가. 이제 정의는 탈구된 시간을 조건으로 삼으면서도 탈구된 시간을 교정하는 것이 된다. “The time is out of joint". 이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제자들의 애도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등장과 죽음, 부활이 시간을 탈구시킨 '사건' 그 자체가 아닌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애도는 성공한 애도일까.(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인용 및 참고하였음)
상속의 책임
모든 애도가 어떤 이중 구속의 어려움 속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애도자가 애도받는 자와 어떤 정의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질문으로 제기된다. 햄릿의 상속하기가 과거로부터의 명령을 선택하고 선별하는 과정이었으며, 예수의 제자들의 상속하기가 과거로부터의 명령에 순종하고 따르며 한편 해석하는 과정이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속한다는 것은 항상 이미 어떤 장소에 놓여 있는, 예컨대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재산이나 자본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상속은 결정과 책임과 응답을 함축하며, 따라서 비판적 선별과 선택을 함축한다. 가다머Gadamer 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상속은 이해의 구조, 해석학적 순환 속에 놓여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항상 선택이 존재하며 또한 상속에 대해서는 갚을 필요와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는 참되고 유일한 ‘선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상속한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과거의 상속자라는 것이 과거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지령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과거로부터 도래하는 어떤 명령이 존재하지만 도래하는 것(장래)으로서의 어떤 과거로부터 도래하지 않는 명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속 개념은 유산, 은행, 저장 등의 개념과 분리되어야 한다.
상속이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상속받는 자의 결정, 책임, 응답, 선별, 비판을 촉구하는 것이라면 이제 우리는 앞선 논의와 관련하여 ‘정의’를 기준삼아 상속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우리는 노무현으로부터 무엇을 상속할 것인가. 지역주의 타파를 외친 그의 행적을 따라 더 이상 지역주의의 유령이 출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니면 권위주의를 해체한 그의 탈권위적이고 민주적인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끝까지 수호하고자 했던 인간으로서의 명예? 노무현은 우리 마음 속의 영원한 대통령입니다?
상속은 은행에 저축된 돈이나 어떤 고정적 실체를 인수하는 것의 의미가 아니기에 정의로운 방식으로 노무현 그 자체의 타자성을 상속하는 것이 아닐까.(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이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묻게 된 것이다) 노무현이 우리에게 상속하고자 했던 것은 노무현 자신이 외치던 구호의 문자적 가치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를 나와 우리 삶 속으로 환대하는 것, 곧 생명 자체의 소중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프로네시스적인 통찰이 아닐까. 그렇다면 노무현을 좌파로든 우파로든, 혹은 중도로 규정하는 것은 노무현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노무현을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이해하여 상속하는 것은 전혀 상속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노무현은 좌파, 우파이기 이전에 인간을 위한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휴머니스트이며, 좌파도 우파도 아닌 결정을 했다는 점에서는 정치적 존재론(좌우)의 경계 위에 선 삶이었으며, 존재론(있음)에 경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한국 정치와 사회의 유령이었다.
좀 더 보충하자면 하이데거에게 [존재론적 체계로서의] 윤리학이 없듯이 노무현에게도 윤리학은 없다. 행동방식을 결정하고, 행동근거를 근거짓는 그 같은 윤리학은 그들에게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이끄는대로 따라가는 것이 본래적 삶으로 규정하며 윤리학이 왜 필요한지를 물었다.[하이데거는 물론 휴머니스트가 아니지만] 아마 노무현은 인간과 생명이 이끄는 대로 정치적 결단을 해온 것이 아닐까.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이념은 '이념‘, ’가능성의 세계‘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따르는 과 그것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반역사적인 이들
이제 어떤 언론과 언론인들에 의한 노무현 비판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노무현의 죽음을 ‘자살’로 규정하여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애도, 상속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자들의 닫힌 윤리의식일 뿐, 일종의 정신적 질병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삶에 타자가 전혀 아무런 행세도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점에서 망상적이며,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고대한다는 점에 폭력적이다. 심지어 그의 죽음의 형식(자살)과 내용(타살)에 있어 형식에 대한 비판만을 고수하는 것은 전혀 정의롭지도 못하며 사태를 전체로서 전체로서 파악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빈약한 지성의 특징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대통령에 대한 자질론을 운운하는 비판 역시 어떤 존재론의 함정에 빠진 맹목적 지성의 한계로 밖에 볼 수 없다. 대통령의 자질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그 직책에 대한 각각의 해석은 다를 수밖에 없음에도 공허한 자질론을 기준으로 자질 있음과 없음을 규정하는 것은 명백히 편향된 것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직을 포함한 모든 직분과 역할은 운동한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운동하지 않는 대통령직을 가정하고 어떤 자질에 부합하는 대통령을 꿈꾸는 것은 어떤 근본주의적인 전근대 사회로의 후퇴이며,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거세한 자를 양산하려는 빅브라더적인 발상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대통령이라는 자가 자살했다고 하며 그 직분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책임론과 관련한 비판은 죽음의 의미도, 직책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논증으로 치부해도 좋다.
따라서 비판자들의 정신에 어떤 환원이 필요함을 요구한다. ‘사태 자체로’ 보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선동적인 구호일지는 모르나 최소한의 정치적 편견과 독선에서만큼은 우리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노무현의 투신이 탈구시킨 시간,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이 정의의 조건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리고 정의의 조건을 정의로 수립하는 것은 상속받는 자들, 바로 햄릿의 사명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정의의 조건으로, 생명과 부활 사건의 조건으로 삼았으며 제자들이 그 조건에 응답할response 능력ability이 없었음에도 예수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을 수행하고자 했던 점, 그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는 점까지도 기억하자.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노무현이라는 유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