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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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골로새서를 쭉 통독을 몇 번 했습니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에바브라를 통해서 바울의 가르침을 전한 골로새에 있는 교회들 - 구체적인 이름으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옵니다 - 에게 “그리스도” 를 다시 한 번 일깨우면서, 그 당시에 골로새 교회에서 일어난 유대인의 절기를 다시 지키는 율법주의와 금욕주의, 그리고 신과 인간을 매개한다는 천사를 숭배하는 것과 같은 잘못된 신비주의를 바로 잡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반부에는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인사와 감사, 그리고 기도, 후반부에는 바울 서신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생활에 있어서의 바울의 당부, 서로에게 대한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 드러나는데, 저는 골로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 부분에 집중을 해보았습니다.


1장 15-20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상(에이꼰)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쁘로또또꼬스)이십니다.


만물이 그 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주: 천상의 힘을 말하며, 골로새서 내에서도 그렇지만 바울 서신을 통틀어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며 그리스도에 의해서 힘을 잃고, 그 아래에 굴복되는 것으로 표현 됩니다. 엄밀히 말해서 히브리적 요소는 아닌 듯 합니다) 만물이 그 분을 통하여 또 그 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 분 안에서 존속(함께 서다, 존재하다)합니다.


그 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 분은 시작(아르케)이시며 죽은 이들(네크로스) 가운데서 으뜸(쁘로또또꼬스, 가장 먼저 난 자, 맏이)이 되십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쁠레로마, fullness)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 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에이레노뽀이에오)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 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제일 첫 느낌은...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분명히 ‘예수’를 포함하지만, 예수를 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역사적 예수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존재의 뿌리로서 영존(永存)하는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는 사실 “인간성” 조차도 넘어서 있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만물에 앞서고, 만물은 그 분 안에서 존속한다는 말은 참 묘하고도 신비한 통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도 그냥 제도적 교회라기보다는 온 세상, 우주가 그리스도의 교회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향 하에 있는 모든 우주만물이 결국은 교회가 되겠죠. 그 표본으로서의 대표성이 제도적 교회에 주어진 거겠구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만물이 그를 시원(아르케)으로 해서, 그를 통하여(디(아)’ 아우뚜 through him), 또한 그를 향하여, 혹은 그의 속으로(에이스 아우똔 into him) 화해되어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완성의 시작이면서 그 과정이며, 또한 그 완성의 목적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신비를 통한 평화와 화해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구요.


1장 24-29절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들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원문적으로는 “그 신비는 여러분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그 영광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를 위하여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기운(에네르게이아)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감추어져있다가 이제야 드러난 신비는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그 영광의 희망”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공동번역은 “이 심오한 진리는 곧 이방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조금은 가벼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냥 그리스도라는 “객체적 대상”을 믿게 되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데, “그 신비는 여러분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그 영광의 희망입니다.” 라고 원문을 형태 그대로 따오면 주객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 나” 의 관계가 느껴지거든요. 즉, 그리스도라는 이질적인 “씨” 가 “나” 라는 토양 속에 존재하면서 완성의 그 시간에 영광스럽게 꽃필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이게 사실 엄청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엄청난 신성모독이 될 수도 있는 거구요. 바울은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연 것 같습니다. 이게 지금 현실 교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질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두 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도 있다는 말인데, 이 것은 우리 속에 내재하면서도 우리를 넘어서 있는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고백처럼 그 그리스도는 바울 속에서 실제적인 힘으로 바울의 힘든 사역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장 3절


『그리스도 안에 지혜(소피아)와 지식(그노사이스)의 모든 보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정각(正覺)과 정념(正念)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혼돈 속에 있는 이 세상과 사태 속에서 그 것을 넘어 제대로 된 진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이죠.


2장 9절 -10절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공동번역에는 9절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위의 본문과는 뉘앙스가 왠지 좀 다릅니다... 왠지 의역이 너무 심하게 들어간 거 같아서 원문을 한 번 같이 적어보았습니다. (아직 헬라어 초보가 좀 나대는 것 같지만, 원문의 느낌을 함께 한 번 가져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거 같아서 한 번 만용을 부려봅니다.)

 

 ὅτι   ἐν   αὐτῷ   κατοικεῖ   πᾶν   τὸ   πλήρωμα   τῆς   θεότητος   σωματικῶς.


(호띠 엔 아우또이~ 까또이께이~ 빠~안 또 쁠레로오마 떼~스 테오떼에또스 소오마띠꼬~스)


호띠는 영어의 that 절을 이끌기도 하고, so, for 처럼 “그래서”의 순접의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순접의 의미로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엔 아우또이~ 는 in him, 까또이께이는 동사원형 “까또이께오” 의 3인칭 단수 현재입니다. “머무르다, ~ 에 거처하다” 는 뜻이구요... 빠~안 은 all... “” 는 the 의 중성 단수 주격입니다... 헬라어에서는 관사도 성과 격에 따라 변형 하더군요... 프랑스어가 그렇죠... 쁠레로오마는 fullness, 즉 ‘충만함, 가득함’ 을 의미합니다. 떼~스는 the 의 남성 단수 소유격이고, 테오떼에또스는 divinity, 신성을 말합니다. 소오마띠꼬~스는 ‘소마또스’ (몸) 의 부사형태입니다... bodily, in bodily form, truly... “몸으로, 몸의 형태로, 때로는 뚜렷하게, 구체적으로” 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그대로 옮겨보면


for(So) in him lives all the fullness (of) the divinity bodily


이 말씀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 실제적으로- 거한다.” 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도 역사적 예수를 포함하지만 역사적 예수가 나타나기 전부터 계셨고, 그를 넘어서서 그의 필연적인 부활과 함께 지금도 현존하면서 뚜렷이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장 1절- 4절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 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


원문과 비교해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최근에 나온 천주교 새번역 성경은 원문에 충실한 정도가 아주 모범적인 수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여전히 불확실성과 잠정성(暫定性)속에 있지만 - 땅의 인간으로서의 한계성 속에서 여전히 고통과 염려, 불안감, 동물적인 한계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 언젠가 완성의 시간에 우리 속에 숨어있던 그리스도,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드러나게 될 때, 찬란한 영광 속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네요.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 그대로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으로 읽히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는 타자 관계임에 반해서, 그리스도는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만물들과의 타자성(otherness)을 극복한 존재자라는 점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에크하르트는 Gott(God) 와 더불어 gott(god) 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영혼 깊이에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낳았다.” 라고 할 때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가 바로 gott 이며, 그가 바로 “그리스도” 와 관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결론을 내려야할지는 나도 모른채 무작정 글을 마칩니다.


profile

paul

2009.11.03 09:05:30
*.32.191.48

정말 멋지네요. 원문을 하나하나 해석하시니 저자의 뜻에 다가가기 훨씬 쉬울것 같습니다.
첫날처럼님의 멋진 글을 읽으니 어린아이가 어른을 동경하듯이 저도 원문을 읽으며 저자의 음성을 하나 하나 되새기고픈 마음이 굴뚝이네요. 희브리어를 어떻게 하면 쉽게 접근 할 수 있나요?
얼마전 계시판에 간단히 올려 주신 것 같은데 혹시 도움 될만한 싸이트 있으면 소개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날처럼

2009.11.03 09:56:11
*.54.79.126

"비블리아 아카데미아" 싸이트 들어가면 유료 강의가 있습니다... 총 120 강의가 될 예정이라고 했는데 헬라어 강의는 40강 근처에서 더 업뎃이 안되고 있어요... 저도 그래서 더 진도도 못나가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영근 교수님 강의가 일품입니다... 언어학적인 소양이 매우 뛰어나신 분으로 보여요,,, 강의가 너무나  상세합니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저도 헬라어가 아직까지는 한 쪽 손은 키판 잡고 한 쪽 손은 땅 짚고 수영하는 수준입니다... 그 것보다 더 못할 수도 있구요... 그런데 조금씩 조금씩 물미가 트이는 게 참 신기합니다, 저도... 더 열심히 노력해서, 다비안님들께 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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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2009.11.03 13:39:43
*.104.196.163

첫날님께서 골로새서를 통하여 풍성한 시간을 보내셨군요.
그 신비를 표현한 바울 사도는 그의 인식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 같고
그것을 또 음미하여 풀어주시는 첫날님도 대단하심.
헬라어는 근처도 못 가보았는데요...^^

첫날처럼

2009.11.03 16:50:06
*.54.79.126

"그리스도는 도대체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이 화두처럼 항상 따라다니면서,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의미, 즉 "어느 시점에 나타난 한계적인 인간이었던 예수" 와 "영존하는 (everlasting) 그리스도" 의 모순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도 생각해볼 문제구요...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참존재성" 의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요샌 그런 생각마저 들어요... 우리가 예수를 "잡았다" 라고 하는 순간 - 보통 목회자들은 예수를 완전히 잡은 듯한 포즈로 이야기를 하죠 - 그 잡은 것은 전혀 예수가 아니라는 것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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