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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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는 비슷한 내용이나 동일한 사건들을 자주 발견합니다.
일종의 사족같은 느낌을 많이 받은적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그것이 비록 비슷한 내용과
구성을 갖췄더라도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나 교훈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지난 주에 므나의 비유를 본문으로 삼은 어느 신학교 교수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제가 성경봉독을 하는데 사순절에 왜 므나의 비유로 설교를 할까 좀 의외였습니다.
그런데 친절하게고 설교하신분께서 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므나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는 말하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가르킨 다면 므나의 비유는 부정과 부패와 타협하지 않은
예수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몇구절만 짚어보겠습니다.
누 19:12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 왕위를 받으러 가는 귀인은 바로 헤롯의 아들입니다.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 헤롯의 아들은 헤롯 보다 더욱 악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가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15~19: 달란트 비유 처럼 므나를 받아서 이윤을 남긴 종들은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받습니다.
여기서 므나를 받아서 이윤을 남긴 종들은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나 명예와 권력
생존 등을 위해 ...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불의한 왕을 거부합니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는니라
=> 예수께서는 심지어 그 돈의 악함을 아시고 은행에 입금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또한 악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원하지 않았기에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십자가를 예고한다고 합니다.
27절로 므나의 비유는 끝이 나지만 28절도 므나의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예루살렘을 향한다는 묘사는 바로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을 거듭 강조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므나의 비유를 들으면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우리 말이 주는 뉘항스만 생각하다 보니 말씀을 오해 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또한 성서 기자가 혹은 성서 기자의 공동체가 보도하고 있는 상황과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의 오류가 발생되거나 해석이 닫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므나의 비유는 분명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비슷합니다. 짐작컨데 예수의 이야기를 마태와 누가는 똑같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의 편집은 제자와 사도들의 미션에 가중치를 부여했고 누가의 것은 예수의 저항과 수난을
보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본문비평가나 성서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성서를 향한 열려진 마음과 이해가
우리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또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메가님! 제가 다니는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입니다. 교인이 십여명 남짓합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 민영진 박사님이 계시고요 그 동서가 담임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감리교 목회자나 감독님 들이 가끔 설교를 하러 오십니다.
홈페이지는 없습니다. 저보고 카페에 커뮤니티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허접하게 만들려니 좀 챙피하기도 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민영진 박사님께서 한달에 한번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성경공부를 가르치시고요
두달에 한번 민경식 박사님께서 설교를 맡아 주시고 있어요
한번 오셔요~
대청역 부근에 있고요 교회명은 우리교회입니다.
민경식박사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성경왜곡의 역사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왜곡의 역사의 저자 바트D. 어만의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은 그노시스적이더군요... 그책의 추천인으로는 일레인 페이젤인데 그도 현대판 그노시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바트 D. 어만은 정경성경을 부인하기 위한 수단중 하나로 사본학및 본문비평으로 성경왜곡의 역사를 썼으며, 추후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이라는 책으로 자신의 주장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정경을 부인하는 작업으로 포석을 깔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왜곡의 역사라는 책이라는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을 번역하신분은 어떠하신지요? 언제 그분께 제 이야기를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므나의 비유도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쉽게 인정할수는 없군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 가져다주는 자가당착에도 쉽게 빠질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르켈라우스가 왕위를 받으러 로마로 갈때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로 갈리리나 혹은 애굽에 계셨을터이니 아르켈라우스가 므나를 맡긴 사람과 일치되기가 힘들겠습니다. 므나를 받은 사람 10명은 귀인의 종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귀인은 중간에 주인으로 바뀝니다. 또 악한 종이라고 칭함을 받은자가 왕의 원수가 되어 죽이라고 명 받은자와 동일인이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악한자는 단수인데 원수들은 복수이기 때문이지요. 또 예수께서 이 말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라는 말은 꼭 그 앞의 비유와 연관하여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단락 전환용 문장으로도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이 므나의 비유는 11절의 이유로 인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앞구절들은 잘 알고 계시듯이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제 생각에는 삭개오의 재산분배를 계기로 즉시 나타날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연될것이므로 각자가 맡은 재산에 대해서 충성을 하라는 의미로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신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도 민경식박사님께서 무슨 이유로 그런 설교를 하셨는지 궁금하니 더욱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보니다.
이와 관련된 정욥섭 목사님이 글이 있었군요...
http://dabia.net/xe/39963
'그 모든 것이 해체되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셈법으로 계산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
제가 믿음이 부족한게 맞군요....그나마 조금 알겠습니다.
콰미님,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제가 댓글을 달게 되었군요.
정확히 말씀드려야겠네요.
콰미님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신학교 교수님의 설교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해야 맞겠군요.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고,
위의 비유에서 한 므나를 그대로 주인에게 넘겨 준
악한 종을 예수님에 비유한 대목이 아무래도 꺼림직합니다.
콰미님은 그 설교를 통해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했다고 했는데
난 솔직히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내가 혹시 글을 잘못 읽었나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읽었습니다.
설마 콰미님이 없는 말을 지어서 한 건 아니겠지요.
저는 지금까지 위의 비유를 예수의 승천과 재림 사이
곧 중간시기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한 교훈적 알레고리로 이해했거든요.
그 근거는 이미 므나비유 서두에 밝힌대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구절입니다.
제가 무턱대로 우길 수는 없으니까 제 생각을 정리해 보지요.
므나비유에 등장하는 귀인은 실제로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주전 4년에 유대 땅에 대한 왕권을 확인받기 위해 로마로 여행했던 아켈라우스가 그 인물이지요. 그런데 당시 50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사절들이 로마로 뒤따라가서 그의 임명을 반대하지만 유대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켈라우스는 결국 왕권을 얻어 귀국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켈라우스는 귀국 후에 유대인들에 대한 피비린내나는 보복을 단행했고
그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되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는 누가는 이 사건에 등장하는 왕위 주장자의 비유를
므나 비유에 첨가함으로써 예수의 승천과 재림 간의 중간시기를 살고 있는 제자들의 삶에 일종의 교훈적 알레고리로 활용했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귀인(그리스도)이 왕권을 얻기 위해 먼 나라(승천)로 떠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업무를 자기의 종들(제자들 혹은 그리스도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의 백성(유대교로 대표되는 유대인)이
그(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예수에 대한 메시야 부정).
그러나 결국 그는 왕권을 받아가지고 귀국했다(재림).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종들(그리스도인들)이 행한 일에 따라 그들을 보상했고
마지막 심판 때에 원수들을 심판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책임을 물으시고 원수들에게 심판을 행하신데서
예수만이 최후의 심판자임이 똑똑히 드러납니다)
역사적 예수가 당시에 불의한 세력을 거부한 것은 사실이고
본문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왕도 악한 것은 사실입니다.
(백번양보해서 비유에 등장하는 왕이 역사적 왕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었다하더라도)
므나 비유의 악한 종을 악한 왕에 대한 거부자로서 예수로 풀이한다는 건
단순한 비약의 수준을 넘어 해석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산중 기도원에서 삼류부흥사가 그런식으로 설교했다면 애교로 봐줄 있지만
신학교 교수님이 그런 식으로 설교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혹시 동영상이라도 했으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군요.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는 마십시오.
콰미님을 겨냥해서 쓴 글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