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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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페니키아 여인과 예수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위험하다", "과하다" 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말하자면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한 신 예수님이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못내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겠지.
헤겔은 존재의 리얼리티를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보았다. 나는 그의 안목이 탁월함을 느낀다. 그의 생각을 빌려서 말해보자면 "인간은 도상의 존재(Existence on the way)"인 것이다.
도상의 존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책을 통해서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든,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든 오늘 내가 체험한 내용보다는 내일의 체험이 더 확장되어 있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확장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인간의 존재는 변화속에 있다. 인간의 존재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적인 존재의 형태로 이 땅에 오셨다면 이러한 인간의 특성까지도 완전히 품고 오셨음에 틀림이 없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는 "완전한 인간" 일 수 있고 우리의 구원에 개입할 수 있다.
예수는 이 땅에서 한 여인의 품에서 나고 자랐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세상 속에서 수많은 것을 경험 하였다. 그 경험 중의 하나인 시로페니키아 여인과의 만남도 예수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눌만큼 큰 경험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는 시로페니키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마음이 아팠을 것이고 큰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그녀에게 집중한다. 나는 여기에서 오히려 예수의 신성의 비밀을 본다.
모든 것에 대해서 열려 있는 감수성, 때로는 스스로 주체의 자리를 버리고 흔쾌히 객체의 자리로 물러나면서 상대를 주체의 자리로 올려줄 수 있는 용기, 자유, 그 사랑이 바로 예수의 신성의 비밀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 방식으로 존재하는 예수를 생각하고, 그런 예수일 때에만 안도한다. 예수가 우리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불안해진다. 마치 야구의 노히트 노런 경기를 보면서 가슴을 졸이듯이 예수가 실수라도 하나 했으면 어쩌나 가슴 졸이며 항상 그를 위한 변명에 열을 올린다.
십자가의 죽음을 직감하고 겟세마네에서 처절하게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그저 하나님과 짜고 치는 쑈였다면... 십자가 상에서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말이 성서 기자들에게 성서 기사 꺼리 하나 더 주기 위한 레토릭이었다면... 그 속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진실이 없다.
오히려 그 것이 진실일 때에만이 예수는 우리와 구원에 있어서 도저히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예수를 "베레 호모 베레 데우스", 즉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이 고백을 신앙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고백이 허물어지면 신앙은 무너지고 만다.
우연일지는 모르지만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라는 이 고백의 순서에 주목한다. 즉 우리는 예수의 인간성 속에서 밝히 드러난 신성을 고백한다.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에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죄를 묻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올리던, 인간을 넘어서 있는 예수의 그 진정성을 보고 백인대장은 슬퍼하며 저 사람은 참 하나님이었다고 고백했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를 구체적 인간으로서 만났지 가현적 인간으로서, 혹은 어떤 원리로서 만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완전함, 전지전능함이라는 신적 프레임에 갇혀서 인간의 형태를 가진 것 외에는 우리와 전혀 다른 가현적 예수(docetic Jesus)를 믿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런 신앙의 결말을 비인간화로 본다.
지금 한국 교회의 비극이기도 하고...
평신도 신학자가 되어가는 중이군요.
가독력을 떨어뜨리는 저 부호는 무슨 현상인지 모르겠네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