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본문은 마 5:1-12절이다. 정확하게는 3-10절이다. 각각의 절에 하나씩의 복이 나열되어 있다. 팔복은 그것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라 소위 산상수훈의 일부에 속한다. 산상수훈은 마 5-7장이다. 산상수훈은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타이틀로 불린다. 소위 황금률도 이 안에 들어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팔복도 황금률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서로 다른 경우에 하신 말씀을 나름의 신학적 바탕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처리한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대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한 묶음으로 읽어야 한다.
황금률대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이 말씀대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만한 배짱을 지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치킨 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해서 네 식구가 겨우 먹고 살 정도다. 그런데 갑자기 길 건너편에 또 하나의 치킨 집이 문을 열었다. 이 동네에서 두 치킨 집이 다 잘되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누가 망하든지 끝까지 가야 하는지, 서로 타협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지, 이걸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치킨 집 사장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경우에 황금률을 따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교회 사이도 그렇고, 부부 사이도 그렇다. 이 현실에서는 남을 자기와 똑같이 생각할 수가 없다. 모든 게 경쟁구조로 돌아가는 이 시대에서 황금률은 ‘공자 왈’로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황금률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단 말인가? 황금률이 속한 문단을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마 7:7-12절에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다. 그것의 마무리가 바로 황금률이다. 황금률의 바로 앞 절인 11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생존을 지켜주신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과도 경쟁이 아니라 상호 도움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참된 신뢰 관계가 인간관계의 초석이 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