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4)
어제 묵상의 끝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오늘 보충 설명하겠다.
우리 인생과 천국 경험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간혹 ‘천국에 다녀왔다.’는 식의 간증이나 그 유으 책들이
한국 기독교계에 유행을 타는 경우가 있다.
천국에 가서 무엇을 보고 왔다는 식이다.
그걸 무슨 특권처럼 떠벌리고,
청중들은 그런 이들의 말에 혹한다.
그런 건 장사꾼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천국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다.
그냥 쉽게 하나님 나라라고 보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누구도 규정할 수 없다.
사람이 그걸 규정하는 즉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천국에 다녀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자신의 얄팍한 상상력으로 재단하는 것은
아무리 진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 경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경험이다.
피터 아이혀는 <신학의 길잡이>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 신학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물음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문장에서 신학이라는 단어를 삶으로 바꿔도 된다.
삶을 결정하는 하나의 물음은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다.
이런 걸 단순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하나님의 통치에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호흡, 공명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제공받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놀랍도록 영혼 가득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쉽지 않다.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게 되고,
없는 자는 가진 것조차 빼앗긴다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신학공부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앗, 여기 하루종일 달렸던 댓글 하나가 금방 사라졌네요.
원당리 마을 총회 참석하고, 또 다른 일로 좀 바빠서
밤에 답을 달렸고 했었는데요.
내 기억으로는 신학대학 교수가 목회자보다
영적으로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느냐, 하는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학대학 교수도 교수 나름이고
목회자도 목회자 나름입니다.
평균적으로만 본다면 신학 교수의 영성이 더 풍요로운 건 분명합니다.
그러니 신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거겠지요.
교회를 크게 키운 목회자들은 신학자들을 비판합니다.
믿음은 없고 그냥 신학 지식만 있다고 말이지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고
루터를 보면 됩니다.
그는 목회자이기는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신학자였어요.
그의 종교개혁은 신학적 숙고에서 나온 겁니다.
사실 신학과 영성은 불가분리지요.
이제 눈이 그만 오려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