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6일
나인 성 과부와 예수 어머니 마리아
예수는 나인 성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설교에서 이 순간에 예수가 자기 어머니의 미래를 내다봤을지 모른다고 잠깐 짚었다. 예수가 점쟁이도 아니고 자신의 미래를,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운명을 미리 알았다고 말하는 건 논리적인 게 아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좀더 본질적으로 보면, 그게 예언이라면 예언이다.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으니 그 하나의 일에 자신이 전념할 수 있다면 그의 말은 예언이 된다.
나인 성 과부의 운명과 예수 어머니 마리아의 운명은 비슷하게 연결된다. 양쪽 모두 참척의 고통을 겪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자식이 자기 생존의 모든 것이었다. 더구나 아들은 더하다. 자식을 잃는 고통은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예수의 최후의 유혹> 첫 장면은 무력 독립 운동을 하다가 로마군에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어떤 남자의 어머니가 십자가 형틀을 만든 목수 예수에게 퍼붓는 저주다. ‘내 아들이 달린 십자가에 너도 똑같이 달려 죽을 거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그런 마음으로 지금 예수는 나인 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울지 말라.’ 위로했다고 보는 건 성서를 깊이 있게 읽는 시각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