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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반론이 가능하다. 목사의 구원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한국교회의 현실을 외면한 채 신학적인 이상에만 치우친 거 아니냐? 자기 구원에만 천착하고 목회는 등한히 해도 좋다는 말이냐? 반론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쉬움은 토로할 수 있다. 그런 입장과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목사로서의 진정성을 상당한 정도로 확보하면서도 교회를 성장시킨 목사들도 많다. 그들을 향해서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더 집중하라는 나의 주장은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목사의 구원은 목회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다음이다. 목회 행위는 눈에 확 들어오는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들어오지 않는다. 목회를 성공적으로 잘하면, 그리고 운이 따르면 교회가 성장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목사가 된다. 이런 쪽의 일들은 저절로 열심히 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진도가 잘 안 나간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선포를 생각해보자. 이게 실질적으로 느껴져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손에 들어온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해하는 것만큼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목사들이 이해하는 생명이 생물학과 사회학과 인문학의 차원에서도 부족할 게 없을 정도로 깊이가 있어야만 그가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느낌과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목사는 어쩔 수 없이 목회 행위에만 매달린다. 내 생각에 우리 목사들은 목회 행위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훨씬 더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대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침 햇살에 증발해버리는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설명을 불편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루터의 ‘솔라 피데’ 개념이 가리키고 있는 신앙의 능력을 무시한 당시 로마가톨릭 교권주의자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