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54쪽
선의 기준을
주관적으로 만족과 행복 안에 바탕을 두게될때,
선의 탐구가 인간 에게로 돌아가는 왜곡이 일어난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악한 사람도 그악에서 쾌락을 발견하기 때문에
쾌락이 선의 현존을 증명 하는것이 못된다고 말했다.
모든 타율적 도덕은 그 추종자의 비판적 능력을
작동 시키지 않기 때문에 제2의 행복주의이다.
행복과 선사이에 어떻게 선의 우의성이 확립될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현재 달성할수 있는 만족이 선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물리치므로
플라톤과 고대철학적 윤리학을 능가했다.
어거스틴이 선과 하나님관념을 연결시킨것은
주관적 신앙이 아니라 철학적 전통안에서 이루어졌다.
플라톤은 선을 모든 현실존재를 넘어서는것 으로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로 보았으며,
모든사람과 사물이 선을 추구한다면
만물을 지배하는 신적인것이 되는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게 아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판넨베르크가 속한 현대신학이 중세신학, 초기기독교,
고대 소크라테스 윤리학으로 부터 이어진 모습을 볼때,
현존재에게 사유하게 하는 존재의역사가 놀랍습니다.
이런 공부가 지루한 면이 없지 않지만
삶과 신앙의 내공이 깊어지는 최선의 길이니
힘을 내서 꾸준히 가봅시다.
홧팅!
쪽수 표시가? 151-154 이지요?
선의 본성은 행복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의해 측정하기에
선에 대한 윤리적 탐구는 인간 자신에게로 되돌아 간다.
어거스틴은 행복은 인간이 현세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미래의 우위성에 따라 미래에 완성된다.
지루하고 더디지만 재미있습니다.
쪽수 교정해놓겠습니다.
지루하지만... 재미있다고 하셨군요.
요즘 처리할 일이 많아서 강독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일 다녀와서 올려야겠네요.
혹시 시간이 나면 한번쯤 올리고 갈지도 모르겠어요.
선의 기준을
주관적으로 만족과 행복 안에 바탕을 두게될때,
선의 탐구가 인간 에게로 돌아가는 왜곡이 일어난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악한 사람도 그악에서 쾌락을 발견하기 때문에
쾌락이 선의 현존을 증명 하는것이 못된다고 말했다.
모든 타율적 도덕은 그 추종자의 비판적 능력을
작동 시키지 않기 때문에 제2의 행복주의이다.
행복과 선사이에 어떻게 선의 우의성이 확립될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현재 달성할수 있는 만족이 선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물리치므로
플라톤과 고대철학적 윤리학을 능가했다.
어거스틴이 선과 하나님관념을 연결시킨것은
주관적 신앙이 아니라 철학적 전통안에서 이루어졌다.
플라톤은 선을 모든 현실존재를 넘어서는것 으로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로 보았으며,
모든사람과 사물이 선을 추구한다면
만물을 지배하는 신적인것이 되는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게 아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판넨베르크가 속한 현대신학이 중세신학, 초기기독교,
고대 소크라테스 윤리학으로 부터 이어진 모습을 볼때,
현존재에게 사유하게 하는 존재의역사가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