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64쪽
쉴라이에르마허는 최고의 선을 자연이 이성에 의하여
이성으로서 침투되고 통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자연을 점점 더 자기운명의 도구와 상징으로 이용하여
문화 발전 과정의 철학이 되었다.
이제 최고선은 이성적 프로그램의 실현에서 올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인간행동의 범위 안에는 결정적인 해결책이 없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개선에의 헌신으로 무익하지 않고 본질적인 일이다.
이 세계의 역동성에 관여하고 있는 초월자를 자각해야 한다.
초월자는 현재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가지도록 도와주며
현재를 변혁하도록 열심을 일으킨다.
눈에 보이는것이 다가 아니다는 명제의 의미가
바로 초월자를 자각 하는일 인것 같습니다.
임시적인 것에 헌신하는것은
기독교적 하나님나라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적 제도에 인간의 복종을
요구할 완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제도의 힘으로 부터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
사랑을 통한 변화의 요구를 거절하는 세상에
심판을 선언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고만 있는게 아니라는것 같습니다.
이 가을이 허무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부단히 삶자체에 밀착하는 태도로 돌아와야겠습니다.
일상에서 우주론적 사건들을 볼수있으면
행복주의에서 걸어 나올수 있을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에더스 님에게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슐라이허마허는 2원론으로 인간 스스로 선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으나,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초월자를 지각하고
그 통치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사랑과 비판을 통한
자유와 평화를 위한 변화를 계속 창조해 나간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최고의 선을 자연이 이성에 의하여
이성으로서 침투되고 통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자연을 점점 더 자기운명의 도구와 상징으로 이용하여
문화 발전 과정의 철학이 되었다.
이제 최고선은 이성적 프로그램의 실현에서 올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인간행동의 범위 안에는 결정적인 해결책이 없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개선에의 헌신으로 무익하지 않고 본질적인 일이다.
이 세계의 역동성에 관여하고 있는 초월자를 자각해야 한다.
초월자는 현재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가지도록 도와주며
현재를 변혁하도록 열심을 일으킨다.
눈에 보이는것이 다가 아니다는 명제의 의미가
바로 초월자를 자각 하는일 인것 같습니다.
임시적인 것에 헌신하는것은
기독교적 하나님나라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적 제도에 인간의 복종을
요구할 완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제도의 힘으로 부터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
사랑을 통한 변화의 요구를 거절하는 세상에
심판을 선언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고만 있는게 아니라는것 같습니다.
이 가을이 허무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부단히 삶자체에 밀착하는 태도로 돌아와야겠습니다.
일상에서 우주론적 사건들을 볼수있으면
행복주의에서 걸어 나올수 있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