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스트인 에라스무스를
비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점의 첫째는,
비실존적 태도와 종교적 열정의 결여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에 관한 학자적, 객관적 태도였군요. 둘째는 궁극적 관심사에 대한 물음에서
절대적 태도 결정이 회의주의의 인간 이라는점이고요.
셋째로 휴머니스트로서 구한 평화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순응한것이며,
넷째는 교육과 교양으로 개인의 성장을 문제로 한 교육자의 입장을 대표한것이며
다섯째로 교회에 대한 비판이 합리적 비판이었지만
혁명적 공격력이 결의 되어 있는것으로 보인점 이군요.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의 논쟁에서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의지의 자유는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 신과 협력하여
구원을 위해 활동한다고 했으며, 루터는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단 하나의 확실성만 있을뿐 이라고 했네요.
열광주의자의 존재는 루터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이단의 선고를 받고 억압을 당했지만
루터에 의해서 해방되어 루터원리의 대부분을 이어받음으로 중세의 종파운동과 구별된다는군요.
이들은 신은 과거에 한번만 성서를 통해서 말하고
그뒤에는 침묵했다고 하지않고
신의 말을 들을수 있도록 준비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말한다고 생각했네요.
로마교회는 신과 인간의 객관적 관계로 봄으로써
개인에 대한 칭의에 관해 확신을 주지 못했고
루터는 칭의의 확신은 주었지만 선택의 확신을 주지 못했고
칼빈은 신은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자기를 계시한다는 선택과
칭의 두가지 확신을 준데 대해
토마스 뮌처와 그의 신봉자들은 선택받은자의 집단안에서
선발된자라는 종파적 확신을 가졌군요.
루터가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스트인 에라스무스를
비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점의 첫째는,
비실존적 태도와 종교적 열정의 결여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에 관한 학자적, 객관적 태도였군요.
둘째는 궁극적 관심사에 대한 물음에서
절대적 태도 결정이 회의주의의 인간 이라는점이고요.
셋째로 휴머니스트로서 구한 평화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순응한것이며,
넷째는 교육과 교양으로 개인의 성장을 문제로 한 교육자의 입장을 대표한것이며
다섯째로 교회에 대한 비판이 합리적 비판이었지만
혁명적 공격력이 결의 되어 있는것으로 보인점 이군요.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의 논쟁에서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의지의 자유는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 신과 협력하여
구원을 위해 활동한다고 했으며, 루터는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단 하나의 확실성만 있을뿐 이라고 했네요.
열광주의자의 존재는 루터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이단의 선고를 받고 억압을 당했지만
루터에 의해서 해방되어 루터원리의 대부분을 이어받음으로
중세의 종파운동과 구별된다는군요.
이들은 신은 과거에 한번만 성서를 통해서 말하고
그뒤에는 침묵했다고 하지않고
신의 말을 들을수 있도록 준비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말한다고 생각했네요.
로마교회는 신과 인간의 객관적 관계로 봄으로써
개인에 대한 칭의에 관해 확신을 주지 못했고
루터는 칭의의 확신은 주었지만 선택의 확신을 주지 못했고
칼빈은 신은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자기를 계시한다는 선택과
칭의 두가지 확신을 준데 대해
토마스 뮌처와 그의 신봉자들은 선택받은자의 집단안에서
선발된자라는 종파적 확신을 가졌군요.
신은 역사를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를 주지만
개인에게 직접 말씀 하신다는것은 잘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러므로 저는 종파주의자는 아닌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