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nWAk2sS_cM
종교개혁자들과 종파주의자들의 차이점은
첫째, 종파주의자들은 성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는
신의 현존, 내적인 말을 강조했네요.
둘째, 종교개혁 신학자는 십자가를 사람안에서
신의 자기희생을 강조한 구원의 객관성으로 보았고,
종파주의자들은 고난이나 유한성의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질것을 강조했군요.
셋째, 루터에게는 계시가 성서가 증언하는 역사적 계시로
객관적 사건으로 보았지만, 종파주의자들은
현실적인 인간의 상황에 직접 계시가 가능하다고 믿는것이네요.
넷째, 루터와 칼빈에게서 세례란 받은자의 주관적 상태에
의존하지 않는 은총의 상징으로 신이 그의일을
우리에게 계시했다는 사실이나,
종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성인 세례는 인간의 주체적 참여와
자주적 결단의 능력아래 두었군요.
다섯째, 종파주의자들이 자기들이 참된교회를 구현하고 있는
선택된자들 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네요.
끝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종말론은 신의 나라의 도래를
수직적 차원을 향하고 있고,
해방의 날은 권력투쟁에 말려드는것으로 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날이군요.
종파운동의 태도는 현실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 지는것이네요.
오늘 강독으로 한국교회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상쾌한 바람이 하루종일 불어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성서는 유명론적 신학자들에게서
현실의 교회를 비판하는 교회의 법이었고
에라스무스와 같은 문헌학자에 의해서는
비판적 원리에 따라 연구되는 책으로 다루어져 왔는데
이 유명론적 이해태도나 휴머니즘적인 이해태도는
가톨릭적 체계를 뚫고 나갈수 없었고
루터의 전적으로 새로운 성서해석을 바탕으로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네요.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성서텍스트에 대한
역사적 비평이 이루어졌던것은 성서에 대한
루터의 태도가 가진 영적자유 덕분이군요.
종파주의자는 보통 소종파주의자로 불립니다.
루터 시대에는 재세례파가 그런 이들입니다.
그 뒤로 개신교회에는 소종파가 많이 나타났어요.
퀘이커교도들도 종파주의입니다.
소종파에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이들도 포합니다.
틸리히의 이런 분류에 따르면
신천지도 종파주의자들이지요.
종파주의에도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어요.
복습 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과 종파주의자들의 차이점은
첫째, 종파주의자들은 성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는
신의 현존, 내적인 말을 강조했네요.
둘째, 종교개혁 신학자는 십자가를 사람안에서
신의 자기희생을 강조한 구원의 객관성으로 보았고,
종파주의자들은 고난이나 유한성의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질것을 강조했군요.
셋째, 루터에게는 계시가 성서가 증언하는 역사적 계시로
객관적 사건으로 보았지만, 종파주의자들은
현실적인 인간의 상황에 직접 계시가 가능하다고 믿는것이네요.
넷째, 루터와 칼빈에게서 세례란 받은자의 주관적 상태에
의존하지 않는 은총의 상징으로 신이 그의일을
우리에게 계시했다는 사실이나,
종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성인 세례는 인간의 주체적 참여와
자주적 결단의 능력아래 두었군요.
다섯째, 종파주의자들이 자기들이 참된교회를 구현하고 있는
선택된자들 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네요.
끝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종말론은 신의 나라의 도래를
수직적 차원을 향하고 있고,
해방의 날은 권력투쟁에 말려드는것으로 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날이군요.
종파운동의 태도는 현실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 지는것이네요.
오늘 강독으로 한국교회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상쾌한 바람이 하루종일 불어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성서는 유명론적 신학자들에게서
현실의 교회를 비판하는 교회의 법이었고
에라스무스와 같은 문헌학자에 의해서는
비판적 원리에 따라 연구되는 책으로 다루어져 왔는데
이 유명론적 이해태도나 휴머니즘적인 이해태도는
가톨릭적 체계를 뚫고 나갈수 없었고
루터의 전적으로 새로운 성서해석을 바탕으로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네요.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성서텍스트에 대한
역사적 비평이 이루어졌던것은 성서에 대한
루터의 태도가 가진 영적자유 덕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