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최근에 다비아에 가입해서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그 동안 갈급했던 부분이 많이 채워지는 듯 합니다.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늘 처음에 씁니다만, 항상 진심입니다. ㅎㅎ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우리나라 개신교인이 그렇듯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보수적인 교리와 축자영감설 및 성서무오설을 믿고 있던 평범한(?) 근본주의적인 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이후, 여러 세상학문을 배우면서 교회에서 가르쳐 준 이야기와 세상학문 사이에서 긴장이 발생하게 되었고, 저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세상을 살면서 여러 복잡한 경험을 하다 보니, 근본주의는 비록 그 형태가 기독교라 할지라도 진리와는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소 자유주의적인 신앙이 올바른 형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맘 한구석에는 있었지만, 제 마음속에는 예수를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기독교 교리는 다 부정하더라도 예수를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렸을 적부터 받았던 교회를 통한 세뇌인지 성령의 역사인지는 정확히 모른다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사는 것에는 갈등이 없으나, 주일에 집근처 교회에 다니는 것이 참 고역이었습니다. 쉽게 받아드릴 수 없었거든요. 그 때 나를 다시 신앙의 길로 인도해 준 책들이 바로 리처드 보컴의 책들이었습니다. 리처드 보컴의 예수’, ‘예수와 그 목격자들’, ‘요한복은 새롭게 보기’,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다시 예수를 통해 신앙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제 SNS에 쓴 글을 첨부합니다. 그 당시까지 저의 고뇌와 나름의 해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에서 신앙의 의미.

기독교에서 가장 유명한 변증가를 꼽자면 누구나 C.S 루이스를 먼저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분의 변증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자기 자신을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주장은 사실이거나 거짓인데, 거짓이라면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것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보이는 예수의 행동이나 언행이 정신병 환자라고 수는 없으므로, 예수가 본인이 신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일 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일견 빈틈없고 그럴듯하게 보인다. 허나, 20세기 초에 등장한 양식비평가들의 주장이나, 최근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실제로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바트 어만으로 대표되는 같은 본문비평(이것이 양식비평과 같은지 다른지를 판단할 있는 지식은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정통한 신학자들에 따르면 복음서 자체가 사실을 기록한 문헌으로 없으며, 복음서라는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앙을 고조시키기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 성격의 문서라는 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C.S 루이스의 주장은 허구 위에 쌓인 주장이 되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결국 예수라는 인물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했던 적이 없는 인물이며,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며 4 성인의 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9세기 후반부에 고고학의 발달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던 고대도시들을 발굴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거기서 나온 수메르의 쐐기 문자 비석 같은 것들이 해석되면서 기독교인들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계시된 내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창세기가 쓰여진 시기보다 짧게는 , 길게는 무려 1500년전에 창세기에 나오는 수많은 모티프가 이미 수메르 또는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밝혀지게 것이다. 경건한 기독교인들에게는, 구약의 모세 5경이 가장 오래된 원전이기는커녕, 예전에 존재했던 문명의 이방신의 신화에서 수많은 내용을 차용했다는 점을 참을 없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사실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권의 책을 읽고, 인터넷을 뒤진다면 얼마든지 있는 내용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한국의 제도권 기독교 안에서는 들을 없다는 점이다. 기껏 해봐야 C.S 루이스의 논증을 들을 있을 뿐이다. 볼트만이나 바트 어만의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거나, 도마 복음의 내용이나 진실성에 대해 토론 있는 분위기는 상상조차 없다. 이런 점을 , 한국의 기독교 정확히는 개신교(가톨릭은 내가 모르니까) 근본주의적인 면이 강하다.

근본주의는 어떠한 형태든지 나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근본주의보다 사상적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는 확신할 없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처럼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신앙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당연히 서양의 합리주의와 계몽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자신의 삶에서 적용하는 도덕적 원리를 성경에서 찾지 않는다. 이는 스티븐 핑커가 그의 위대한 책인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설명한바 있다(링크참조 http://psycholic-a.tistory.com/m/10).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본인 스스로의 도덕적 원리를 성경에서 찾고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또한 일부 사실이다. 그들은 창조과학을 의심 없이 믿고 있으며, 동성애(정확히는 동성애자들) 경멸하여, ‘차별금지법 반대한다(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면 차별을 지지한다는 뜻인가?). 목회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강조하며, 신자들의 지적 수준이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들 일부 여성 신도들을 어린아이로 생각하지 않고 성인으로 대우하다 못해 성적으로 사랑하기까지 한다. 당하는 여성 신도들의 의사는 상관없다. 그들은 어린아이니까. 그리고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목사들은 근본주의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보통 교회법에 의해 용서를 받는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더니 세상보다 어둡다.

근본주의자들과 박근혜의 공통점은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이 무어라고 하든 My way 외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부에서는 올바른 신앙으로 인정받는다. 기저에는 두려움이 깔려있다. 신앙에 이성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바트 어만에게, 불한당 같은 불신자에게 설득 당할 것이 무서운 것이다. C.S 루이스까지만 생각하고, 이상은 보고도 본척하는 것이 상책이다. 속으로 훌륭한 변호를 하지 못했다고 C.S 루이스를 원망하면서.

여기서 리처드 보컴이 나타난다. 나는 리처드 보컴의 책을 읽고 어렸을 읽었던이야기 탈무드 장면이 생각났다. 남자가 어떤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내용이 악마와 인간이 체스를 두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악마의 다음 수에 인간이 패배하는 장면이다.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그가 조용한 미술관에서 외친다. “거짓이다! 거짓이야. 인간이 악마에게 지다니 믿을 없다!” 당연히 경비에게 끌려나간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들어와서 그림 앞에 선다. 그리고 다시 외친다. “거짓이다! 거짓이야. 인간이 악마에게 지다니 믿을 없다!” 다시 끌려나갔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림 옆에 구경꾼이 많이 몰려들었다. 아니 오히려 남자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외친다거짓이다! 거짓이야! 그림은. 인간에게는 수가 남아있고, 악마를 이길 있단 말이야!” 그렇다. 그는 인간이 악마에게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림을 뚫어지게 보았고, 마침내 수를 찾아낸 것이다. 나에게는 리처드 보컴이 남자였다.

바트 어만이 복음서를 믿을 없는 책으로 공격했고, 공격은 이미 기정 사실인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리처드 보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증했다. 복음서는 처음 예수를 목격한 목격자들의 증언과 의견이 정확하게 전달된 책이었고 예수의 언행이 당시 있는 가능한 가장 정확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장이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드려 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적어도 바트 어만의 공격에 대해 충분히 반박할 수는 있게 되었다.

C.S 루이스는 옳았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이 맞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성이 개입하더라도 얼마든지 올바른 신앙을 세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신앙은 다시 흔들리기 않는다. 아니, 흔들리더라도 다시 바로 잡을 있다. 그에게는 마지막 수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국의 개신교도 마지막 수가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제가 의사이지만 저의 의심병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신학 책들을 읽어보면 역사비평, 양식비평 등은 이미 신학계의 대세 또는 전제조건이며, 거의 진리에 가깝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리처드 보컴은 그 역사비평을 공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 역사비평을 알고 공격하니 그 이전의 근본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과는 궤를 달리하기는 합니다만, 주류 신학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예수와 그 목격자들이라는 책이 가장 논쟁적일 듯 합니다. 역사비평의 주장은 복음서는 각 신앙공동체의 전승이나 믿음의 결과이지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이제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컴은 이 주장을 공격하고 들어옵니다.

역사서술은 어떠한 형태든지 해석된 기록일 수 밖에 없는데,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유대 및 로마의 역사 서술의 원칙은 가장 좋은 것은 역사적 사건을 겪었던 당사자가 기록하거나 그것이 불가능 할 경우 목격자의 증언(autopsy)을 통해 생생한 기억 속에 있을 때 기록되어야만 참된 역사적 기술로 인정 받았다는 그 당시의 분위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기독교 복음서는 불교나 이슬람 등과 같은 타 종교와 달리 예수님 사후 무척 이른 시기에 기록된 점을 볼 때 저는 이 주장의 타당성을 제 나름대로 어느 정도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보컴은 왜 그 시기에 복음서가 작성되었는지를 천착하였습니다. 기존의 양식비평은 신앙공동체의 믿음의 고백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보컴은 목격자들이 살아있을 때에는, 각공동체에서 그들의 증언이 살아있는 복음의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은 직후, 또는 죽음이 가까웠을 때 복음서가 더 이상의 목격자가 없을 때를 위해 작성되었다는 주장을 현대까지 연구된 구전 모델을 비롯한 여러 근거를 통해 논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무시되어왔던 2세기의 교부 파피아스의 보고를 자세히 분석하여 마가복음의 경우 베드로의 목격자 증언이 충실히 담겨있는 책, 요한복음의 경우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직접 쓴 책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에베소의 장로 요한이라는 것을 밝히는 장면은 마치 탐정이 범인을 잡는 듯한 추리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하였습니다.

마침 이분도 조직신학을 했다니까 목사님께서 잘 아실 듯 하여 여쭈어봅니다. 리처드 보컴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란 책을 보면,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더 정확한 새로운 학설이 덜 정확한 오래된 학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동설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직 발달이 덜되어 하늘의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는 그 동안의 이론이 쌓여왔던 천동설보다 오히려 못했다는 점을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의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써 학회에 참석해 보면, 새로운 학설을 들고 나온 분들은 그전의 주류 학설을 가지고 계신 분들의 무수한 공격과 비판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증적으로 증명이 되면, 그제서야 주류학설이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목사님께서 보실 때, 역사비평이라는 것도 새로운 세대가 오면 다시 지양될 수 있는 학설일까요? 혹시나 그 처음을 여는 발자국이 보컴일까요? 목사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