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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0월 3일에 9월 독서모임을 갖습니다. 오후 2시까지 샘터교회로 오시면 됩니다. 함께 읽을 교재는 <예언자적 상상력>입니다. 아래와 같이 내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다소 장황합니다만 책을 모두 읽지 못한 분들에게 참고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월 31일에 가질 독서모임에서는 정용섭 목사님께서 다비아 매일묵상에서 추천하신 <신이 된 심리학>(폴 비츠 저, 장혜영 역, 새물결플러스, 2010)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10월 3일 모임까지 다른 제안이 없으면 이 책으로 10월 독서모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예언자적 상상력> 정리 요약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 2000년 개정판 서두에 실린 책 해설에서 숭실대 김회권 교수님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브루그만이 밝힌 “파라오의 압제체제”에 빗대어 현재에도 “예언자적 저항”이 절실함을 역설합니다. 브루그만이 갈파한 바, 예언자적 저항은 이성과 법질서로 지탱되는 기득권 체제가 실상 대안적 세계에 대한 소망을 무력화하는 죽은 세계임을 고발하는 목회활동입니다. 이 같은 저항의 목회는 현재의 질서를 합리화, 고착화 시키려는 언술들이 허위 의식임을 드러내고 그러한 범주 너머로부터 하나님의 자유가 도래함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부르그만은 반동적 논리의 영역 바깥에서 “현재로 치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묘사하기 위해 상상력이라는 말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예언자적 상상력>은 성서가 제시하는 대안적 상상에 대한 인식론적 지도라 할 만합니다. 부르그만이 제시하는 “예언자적 상상”의 구체적 특성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9월 독서모임에서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기본 텍스트로 해서 삶과 억압, 상상과 소망, 삶의 해방이라는 삼단계 주제로 얘기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상상의 근본성
브루그만은 삶의 근원적 위기는 현존하는 억압이라기보다 대안적 세계를 향한 비전의 부재라고 주장합니다. 같은 논리에서 브루그만의 예언자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 모두와 대립선을 긋습니다. 전자는 현실 비판에는 능하지만 전해줄 약속의 언어가 없으며, 후자는 계몽과 과학을 차단하여 현실에 대한 굴종을 유포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신학은 모두 현실로부터(from reality) 미래를 구상하는 데서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에 반해 상상은 무로부터 (ex nihilo) 역사를 갱신하는 근본적 변혁입니다.
•상상의 현실성
어떤 식으로 상상을 예찬하건 간에 그것이 백일몽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브루그만은 이런 질문 자체가 체제순응적 사고방식(“왕권의식”)의 발로라고 지적할 듯합니다. 그는 포로기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핵심적 과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가 현실적인지, 정치적인 면에서 실천 가능한지, 경제적인 면에서 실현가능한지”에 대한 논증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상상 자체를 보존하고 확산시키는 선포였다고 주장합니다. 상상은 곧 대안적 현실에 대한 상상이며 이는 기존 체제의 질서로부터 자유롭고 피억압자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은 백일몽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킵니다.
•상상의 감수성
그렇다면 상상의 구체적인 작동방식은 무엇일까요? 솔로몬 체제를 억압적이고 정적인 왕권체제로 규정하는 브루그만은 그 체제의 내재적 작동원리로 경영적 사고방식, 종교 도구주의, 탈역사주의를 지적합니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경영적 합리성이 소외시킨 격정과 파토스를 복원하고, 기득권의 보호자로 내밀린 하나님의 애통과 비판에 귀 기울이며, 영원한 현재 대신 종말의 현실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기득권 체제가 논리로 지탱된다면 대안적 상상은 눈물에서 비롯됩니다. 브루그만은 눈물이 신파조의 자기연민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무감각을 깨트리는 적극적 비판행위이며 도래할 희망의 전조라고 덧붙입니다.
•상상의 집단성
부르그만은 “교회의 실천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예언자적 상상력>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저자가 “예언자적 목회”라 명명한 교회의 사명은 교인들에게 대안적인 현실인식을 제공하여 역사와 운명을 하나님의 자유와 정의에 비추어 재인식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브루그만은 교회를 “대안 공동체”라 명명하여 앞서 지적한 예언자적 대안의식, 애통과 탄식, 그리고 활력의 소생을 경험하는 구체적 공간으로 지시합니다.
•상상의 사회과학
몇 가지의 느슨한 개념적 얼개로 <예언자적 상상력>을 요약하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 위에서 제시한 틀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브루그만의 논리를 포착한 분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보다 저자가 제시하려는 핵심적 테제 자체를 이 요약문이 파악하는 데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걱정을 지울 수가 없군요. 독서 토론회에서 오고 갈 풍성한 대화가 절실해집니다. 다만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는 내내 두 가지 개념이 떠올랐다는 생각을 덧붙입니다. C. 라이트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과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end of history)입니다.
라이트 밀즈가 1959년 강연에서 최초로 제안한 사회학적 상상력의 개념은 개인과 역사(사회변동)의 유기적 상관관계에 주목하는 사회학 행위를 말합니다. 현대를 “불안과 무관심의 시대”(C. Wright Mills, <사회학적 상상력>, 창작과 비평, p. 19)로 규정한 라이트밀즈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사색과 감수성을 회복하여 스스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인간의 사회적 자의식을 일깨우는 학문적 슬로건입니다. 1978년에 최초 출판된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브루그만은 라이트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 개념을 신기하게도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 라이트밀즈의 책 <사회학적 상상력>은 197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상상력이 당대 미국의 지식계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쓰이던 개념이어서 굳이 원조를 언급할 필요가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신학과 인간학으로서의 사회학이 기본 노선을 달리해서였기 때문일까요? 확인 가능한 부분은 사회학적 상상력이 인간에게 역사변화의 주권을 넘긴다면 예언자적 상상력은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브루그만이 “제국이 정해놓은 모든 신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은 사회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58) 라고 진술하는 데서 두 상상력 간의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역사의 종말 개념은 소련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한 1989년 직후 당해 여름에 미국정부의 정책관료 출신이었던 인문학자 후쿠야마가 시카고 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문명비평론입니다. 후쿠야마는 “자유시장경제의 보편화”(Common Marketization)가 인류가 다다를 수 있는 역사발전 단계의 마지막임을 역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패배했고 향후로도 자유주의를 압도할 대체 이념은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정체된 제국의 감성을 “염세, 포만, 권태, 허무감”으로 진단하는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론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반론이 아닌 성서적 대안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