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맨

 

얼마 전 늦은 밤 티브이를 통해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만년설이 쌓여 있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 한곳에서

냉동된 상태로 죽어 있는 어떤 한 남자가 발견되었다.

그 아이스 맨은 자그마치 5천 년 전 사람이었다.

그가 발견된 건 내가 기억하기에는 2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타임지(誌)인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지(誌)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주 오래 전에 그런 기사를 읽은 것 같다.

그런데 그동안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들은 이 아이스 맨에 대해서

나름으로 과학적인 연구를 진행시켰다.

아이스 맨이 죽은 계절과 죽은 이유 등에 대한 결과들이 나왔다.

위 속에 들어있는 음식물을 분해하거나

엑스레이 사진 판독을 통해서

아이스 맨이 전쟁을 하다가 가을에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어떤 법의학자가 다른 연구 방식을 통해서

고고학자들과 반대되는 결론을 도출했다.

티브이 프로그램은 법의학자가 어떻게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뛰어넘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내가 그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본 게 아니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는 같은 사안을 두고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론적 능력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5천 년 전의 시체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고학자들과 법의학자들은 그에게 말을 걸어서

무언가 대답을 찾아내고 있다.

그런데 그 시체를 향해서 정확하게 말을 거는 게 중요하다.

똑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성서 텍스트와 우리 사이에도 2천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

성서 텍스트는 스스로 말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말을 어떻게 거는가에 따라서 성서도 우리에게 말을 할 뿐이다.

앞서 아이스 맨의 죽음과 관련해서 잘못된 결론을 내린 고고학자들처럼

우리도 역시 성서 텍스트에 대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는데,

그중의 하나만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다.

엑스레이 사진을 앞에 두고 고고학자들은 그냥 지나치고 말았지만

법의학자는 갈비뼈 뒤쪽에 있는 어떤 물체를 잡아냈다.

결국 그것은 아이스 맨의 등에 꽂힌 화살촉이었다.

왜 고고학자들은 그것을 놓치고 법의학자는 잡아냈을까?

다른 이유는 없다.

법의학자인 그 사람의 눈이 그만큼 날카로웠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문화유산도 그렇고,

죽은 시체도 그렇고,

성서 텍스트도 역시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과 연관되어 있다.

시, 그림, 음악, 역사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왜 목사들은 성서를 알려고 하지 않을까?

엑스레이 사진을 정확하게 판독하려면

그런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해야하는 것처럼

성서를 정확하게 읽으려면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성서읽기는 기술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말이다.

일단 성서를 읽을 수 있어야

믿든지 않든지 결단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우리는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가운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만 모든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만큼 큰 착각도 없다.

아이스 맨에 관해서 새로운 결과를 제시한 법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아는 것도 일부에 불과하고,

가장 정확하게 알려면 시체를 부검해야 한다고 말이다.

시체 안에 그 대답이 놓여 있다는 말이다.

시체를 부검하려면 매우 정밀한 기술이 필요하다.

위에서 발견된 밥을 분해해서 죽음의 원인과 시간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성서를 부검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 안에 은폐된 사실들을 찾아낼만한 능력이 있을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대신 청중들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이는 흡사 부검의가 청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부검하는 시늉만 하든지,

또는 부검을 연극이나 쇼처럼 꾸미는 것과 같다.

성서는 말이 없다.

그는 우리가 어느 깊이에서 말을 거는가에 따라서

우리에게 대답할 것이다.

 

아이스 맨은 5천 년 전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삶이 주어졌을 것이다.

젊었을 때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을 것이며,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얼마나 즐거워했겠는가.

그가 무슨 연유로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뒤에서 쏜 화살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의 지나간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쳤을 것이다.

그의 주검 위로 눈이 쌓여 썩지 않은 채

오늘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와 우리 사이에는 5천년이라는 세월이 놓여 있다.

그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스 맨처럼 살다가 죽었는가.

지금 우리도 그 친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우리 중의 일부는 땅에 묻혀 우연하게 미라로 남을지 모른다.

그러면 5천년 후 우리의 후손이 우리를 부검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대 사회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현시대인

이 시대를 연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다음 5만년 후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나는 중학생과 같은 자세로 아주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가 분명했다면

오늘 우리가 과거로 돌려진다는 것도 명백하다.

이렇게 모든 것들을 이 세상에 나오게 했다가 다시 사라지게 하는

이 시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알프스 꼭대기에서 냉동인간으로 발견된 아이스 맨이 살던 시대에 비해

오늘 우리의 시대는 엄청나게 풍요롭지만,

시간에 의해서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른 게 하나도 없다.

베아줄기 덕분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120년으로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아니 1천200년으로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이 시간의 힘 앞에서는 당해낼 방법이 없다.

도대체 우리가 5천살 까지 장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니 5천년을 산다고 가정해보자.

아이스 맨이 냉동인간이 아니라 그런 나이로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해보자.

이것처럼 끔찍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지금 어느 정도의 햇수만큼 사는 게 적당한지 알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 60년만 살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90살이 되어도 죽기 싫다고 하니까

이런 건 객관적인 기준으로 뭐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이스 맨이 살던 5천 년 전과 지금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물론 다른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걸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은 시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건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았다.

어떤 사물과 생명이 공간 안에서 움직일 때만 시간이라는 게 존재한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는 시간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늘, 땅, 물고기, 꽃, 사람은 분명히 공간 안에서 존재한다.

이런 존재하는 것들이 가능하려면 시간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꿈 안에는 사물들이 공간을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종말과 시간은 어떤 관계인가?

종말에는 시간도 정지하는가?

시간이 정지한다면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사물들도 정지하는가?

종말 이후의 하나님 나라에 시간이 없다고 한다면,

사실 영원이라는 게 시간을 넘어선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데,

그 안에서의 생명은 공간이 없다는 건가?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하게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을

명증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는 이런 시간과 공간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어떤 행복의 기준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런 정도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

애벌레가 어찌 나비의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비록 시간과 공간 안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지만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벗어나

종말론적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신 예수에게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맡김으로써

그 부활의 세계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때가 오면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게 될 것이다.

그게 곧 시간의 신비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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