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 죽는다.
죽는다는 건 결국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게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총인가. 반대로 우리에게 늙음과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요즘의 문명이 가능한대로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데 만약 그게 현실이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이미 인간에게 늙음과 죽음이 숙명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상태를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상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 절감할 수는 없다.
죽음을 통해서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게 은총이라는 내 생각이 염세주의에서 나온 건 결코 아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삶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종(種)이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 가운데서 생존하기 위해서 터득한 본능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요소이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그런 욕망은 곧 ‘에로스’이다. 그런 본능적인 욕망이 없었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른다.
이제 이 땅의 주인으로 오랫동안 군림한 인간이 여전히 그런 욕망에 의해서만 자기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생존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존 이후의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매우 위험한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일방적으로 독주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극한의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런 위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의 생존경쟁을 치러야 했던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그런 욕망에 의한 삶의 경험을 그런 경쟁이 필요 없는 시대에도 여전히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좀 더 다층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숙명으로 안고 있는 인간이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도 역시 그것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 같다.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으로만 현재의 삶이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삶을 수용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자기를 철저하게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다.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도 자기를 죽음과 같은 정도로 축소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게 참으로 어렵다. 살아있다는 건 늘 자기를 확대하고 성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마당에 자기를 축소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미 예수님은 썩는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생성된다고 말씀하셨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자기를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생명의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빛나는 유일한 길이 아닐는지.
이렇게 말은 하기 쉽지만 그걸 자기의 삶에서 체화하기는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밀알의 비유를 배운 교회마저도 자기를 확대하는 방식으로만 생명을 인식하고 있으니까 다른 세계는 말할 것도 없다. 교회의 크기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용납하는 교회는 별로 없다. 모든 교회가 성장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고 있으니까 결국 한국교회 전체를 두고 보면 결국 사는 게 아니라 죽는 길을 가는 거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자기를 축소하고 늙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런 방식으로 훨씬 빛나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일까? 우리가 이렇게 생생히 살아있는 한 이런 인식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축소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걸 죽음으로 생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게 되어 있다. 자기를 축소하고, 늙음을 받아들이고, 그런 방식으로 진정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좀 거꾸로 가는 말 같지만 생명 자체를 경험하는 것밖에 없다.
결국 이 말은 무엇이 과연 참된 생명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를 축소하지 못한다. 예수가 자신에게 임박하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물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획득되는 생명이라는 게 무엇일까? 오늘 나는 이 질문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다. 이건 또 하나의 다른 질문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육체적 한계를 느끼면 느낄수록, 늙으면 늙을수록 내 영혼이 더욱 깊은 평안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바라고, 그래서 결국 젊음보다는 늙음을 생명의 완성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런 세계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있는지, 그것은 아직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이 못 된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죽음이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 가는것, 성경에서 말한대로
본향을 다시 찾는것,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것,
즉 생명임을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한 곳이네요. 우연히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의 웹사이트는 www.youaregood.com 입니다. 저는 김영석 교수라고 합니다.
위의 글은 정말 좋은 글이군요. 엽락분본이라는 말을 신영복 교수가 좋아하는 구절인데 생각이 나네요.
성서, 문화, 해석이라는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국어로 된 책이나 미국에서 출판되어 아마존에서 구입가능하며 이는 대학생을 감안하여 쓴 교양서적인 성격의 글입니다. 98페이지
정도밖에 안되지만 ... 매우 요약적인 글이지요. 아래 링크에 나와있습니다. 초면에 무례를 용서하세요. 소개하고자 블로그를
찾던중 여기에 우선 오게 되었습니다.
http://www.amazon.com/exec/obidos/ASIN/1442139188/theologicaljourn
김영석교수님..반갑습니다.
한국분 맞으시죠? 그런데 홈페이지는 영문사이트니 접근이 어렵습니다..
한국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한글홈페이지도 병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읽고 싶어도 힘들군요...ㅎㅎ
아무튼 소개 감사합니다..
벌려진 시간의 틈 속에서 진리를 실존으로 덮어버리려는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서 듣게 됩니다.
실존으로부터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나'라는 실존의 현실이 생명의 실체와 어떠한 형식으로 대면하게 될지, 물음 밖으로 나갈수가 없네요.
언젠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젊은 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이 그런 것일까요,
인간의 실존이 허물어지는, 실존과 실체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날의 기다림 그 자체가 경험되어야 할텐데,
다시 마주치게 되는 물음으로 또 맴도는 듯 합니다.
하인리히 오트는, '말하여지지 않은 것이 들려지는 경험' 의 현실성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판 교수님은 경계의 문제를 보편사라는 지평에서 해명하려 하신 것 같습니다만, 혹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의 문제로 끌어내렸고, 여전히 자신들의 확신을 위해 미래적 존재론에 정초된 예기의 불안을 지적하는 듯 합니다.
여전히 저희는 도상에 있을 뿐일텐데,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든것 같습니다.
창 밖의 노오란 개나리는 그저 묵묵히 피어있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