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세상 경험
지금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세계만 알고 있다.
작은 예를 든다면
너무 큰 소리나, 너무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
물질의 소립자를 경험하지 못하고
우주 전체를 조망하지 못한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전자 현미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무한히 작은 미시의 세계를 확인할 수 없으며,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전자 망원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무한히 큰 거시의 세계를 확인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지금 무한히 작은 세계와 무한히 넓은 세계를
관념으로만 추정할 뿐이지 실제로는 경험할 수 없다.
아니 무한은 관념적으로도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니다.
우주가 무한하다면 얼마나 무한할까?
그 무한히 넓은 우주에 1mm만 더 넓으면 그 무한 개념은 파괴된다.
이런 미시와 거시는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먼 이야기니까 접어두고,
그냥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자.
이 지구에는 왜 물(水)이 있을까?
지금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물리, 화학문제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상식적인 차원에서 물을 직관하려는 것뿐이다.
나무나 돌은 그냥 자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왜 물만 일정한 형식이 없을까?
물론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액체의 성질이 바로 그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왜 그게 이 지구에 존재하게 된 것인지,
그게 신기하다는 말이다.
물론 과학자들이 나름의 대답을 주긴 하겠지만
그것이 곧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현상에 대한 논리적 설명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과정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차원은
그들에 의해서 열리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그 주장이 단지 교리적으로만 외쳐진다면
그것도 역시 과학자들의 현상적 설명과 다를 게 없다.
과학은 실증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이며,
신학은 도그마의 지평에서만 접근하는 것이다.
실증도 아니며 도그마도 아닌 접근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이해해야만 하는가?
이 대답은 뒤로 미루고
이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인가, 하는 점을 한번 짚도록 하겠다.
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대답이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왜 이런 모습일까?
토끼와 감나무 중간 쯤 되는 생명체는 왜 없는 것일까?
왜 이 세상은 식물과 동물이 구분되었으며,
인간은 왜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었을까?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 미야자키의 작품에 종종 나오지만
새처럼 날아다니거나 노루처럼 뛰어다니는 나무가
이 세상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지금 이런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거나
진화의 방식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새는 날아야 하고
뱀은 기어야 하고
사자는 달려야 한다.
우리의 오랜 경험이 그것을 절대화하고 있다.
조금 생각을 바꿔보자.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처음 시작했을 때 이미 이렇게 프로그램화한 세상은 아니다.
우리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가
지금 이런 세계로 발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흡사 수십만 마리의 정자 중에서 한 마리가 수정되어 한 생명체가 시작되고
그 뒤로 오랜 세월을 걸쳐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오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인간의 코가 두 개일 가능성도 있었으며
눈이 하나일 가능성도 있었고,
날개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간혹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갖고 태어나는 어린이들이 있는 것처럼
지금의 인간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말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말도 되지 않는 그 무엇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이다.
여기 컵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게 무얼까?
이 컵을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는
동일한 입자이다.
컵과 인간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을 화학분해하면 철, 인, 우라늄, 탄소 등등이 나오는 것처럼
물질과 인간 몸은 서로 하나다.
어떻게 컵과 인간이 하나라는 건 말이 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런 걸 어쩌겠나.
다만 다른 건 이런 소립자,
혹은 원소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헬라 신화에는 신과 인간 사이가 매우 친밀하며,
동물 모습을 한 인간,
거꾸로 인간 모습을 한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성서에도 천사와 악마가 등장한다.
많은 문학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신화를 기본 소재로 구성된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세계가
여러 종교와 문학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이 중층적이라는 뜻이다.
신화의 방식이 아니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이 세상,
이런 운명, 이런 역사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나름으로 대답을 찾아보려는 노력들이 바로 문학, 예술, 종교이다.
이제 우리는 위에서 잠시 뒤로 미뤘던 대답을 찾은 것 같다.
이 세상은 실증과 도그마가 아니라
신비 안에서 조명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신비는 곧 영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은폐되어 있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영적인 능력이야말로
이 세상을 바로 보려는 사람들이 확보해야 할 인식론의 가장 궁극적인 토대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영적인 능력을 성령이라고 한다.
그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다.
안타깝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우리는 아직 그 성령을 모두 아는 게 아니다.
그가 어떻게 이 세상을 끌어가고 있는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게 곧 신학자의 기본 태도이며, 설교자의 기본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곧 이 세상을 신비롭게 만나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는지.
그것이 곧 ‘영성’이 아닐는지.
단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원만 보인다고 합니다.
자세히 돋보기로 보면 정말 무수한 직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원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일까요?
좀더 자세히 원을 구성하고 있는 직선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직선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원형대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기적으로 원자가 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세상경험은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깨닫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성은 무한합니다.
단편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새운운 시각으로 바라 볼 수있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마치 원을 구성하는 직선을 바라 볼 수있는 돋보기와 다시 더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이 있는 것처럼.
이런 것이 영성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