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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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낚시성(?) 제목 입니다. 그냥 제 개인 의견을 말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2000년 가까이 난리치는 "성탄절"이
비 기독교적이고, 비 성서적인 부분이 많다라는 것은
다비아 수준정도의 "인문학적 성서 읽기" 를 하는 분들에게는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우리가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하는 것은
왜곡되게 알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바로 알고
성서의 진정속으로 들어가
성서의 삶을 살아내려고 하는 노력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 마저 시류에 휩쓸리는 "성탄절"에 같이 휩쓸린다면
"인문학적 성서 읽기" 는 무엇인가 ? 생각해 봅니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과 능력도 없지만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
좋은 가르침 있기를 바랍니다
다비안님 모두에게 진정한 성탄이 무엇인가? 를 체득하는 성탄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전 세계적으로 2000년 가까이 난리치는 "성탄절"이
비 기독교적이고, 비 성서적인 부분이 많다라는 것은
다비아 수준정도의 "인문학적 성서 읽기" 를 하는 분들에게는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우리가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하는 것은
왜곡되게 알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바로 알고
성서의 진정속으로 들어가
성서의 삶을 살아내려고 하는 노력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 마저 시류에 휩쓸리는 "성탄절"에 같이 휩쓸린다면
"인문학적 성서 읽기" 는 무엇인가 ? 생각해 봅니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과 능력도 없지만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
좋은 가르침 있기를 바랍니다
다비안님 모두에게 진정한 성탄이 무엇인가? 를 체득하는 성탄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장로님.저는 고교회파적인 성공회 교인이라서 그런지 대림절, 성탄절, 공현절, 성령강림절등의 교회력 절기들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성서에 나오지는 않지만, 교회력 절기들은 분명히 성서에 근거한 성서적 그리스도교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로님의 지적처럼 성탄절에 흥청망청하는 것은 정말 비 성서적인 것이지만, 성탄절 자체는 예수의 성육신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상징하는 거룩한 전통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성탄절에 흥청망청한다고 해서, 성탄절은 비성서적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성탄절의 뜻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장로님이 걱정하시는 성탄절에 흥청망청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내일부터 대림 4주일이 시작되는데, 예수의 성육신을 기다리는 복 된 대림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일부터 대림 4주일이 시작되는데, 예수의 성육신을 기다리는 복 된 대림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평민장로님의 이 리플에 백배 동의합니다.
성탄절이 신학적으로 옳다 그르다 뭐다 하는 이야기는
결국 소모적인 전쟁일 뿐이고 답은 결국 의미의 재해석을 넘어설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산재한, 장로님께서 지적하신 더 무거운 문제가 있지요.
저는 다비아가 나누어야 할 신학적 토론의 의무에 맞물려
이와 같은 시제에 적합한 질문들과 성토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에너지 문제에 관하여
더 적극적으로 담론화, 토론화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여기 계신 성도 한 분 한 분, 회원 한 분 한 분
이번 성탄절부터 실현해 나갔으면 좋겠네요.
괜히 몰트만이 성령의 신학을 강조하고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적 이해를 들춰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탄절이 신학적으로 옳다 그르다 뭐다 하는 이야기는
결국 소모적인 전쟁일 뿐이고 답은 결국 의미의 재해석을 넘어설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산재한, 장로님께서 지적하신 더 무거운 문제가 있지요.
저는 다비아가 나누어야 할 신학적 토론의 의무에 맞물려
이와 같은 시제에 적합한 질문들과 성토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에너지 문제에 관하여
더 적극적으로 담론화, 토론화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여기 계신 성도 한 분 한 분, 회원 한 분 한 분
이번 성탄절부터 실현해 나갔으면 좋겠네요.
괜히 몰트만이 성령의 신학을 강조하고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적 이해를 들춰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완벽하게 그리스도교 교리와 성서에 근거한 전통은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거의 없습니다. 교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자신이 속한 지역문화에 맞게 적응하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 예로 추수감사절은 그리스도교가 초대교회에서부터 지켜온 성탄절, 공현절, 대림절, 성령강림절과는 달리, 근대 미국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미국 개신교회 전통입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에 담긴 순수한 신앙을 존중하여, 한국교회는 교파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서 정교회와 서방교회(개신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성공회) 모두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는 전통도-흔히 정교회에서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 정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교회 교회력을 확인해보니 정교회도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합니다.-, 성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성육신의 신비를 느낄수 있는 전통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 예로 추수감사절은 그리스도교가 초대교회에서부터 지켜온 성탄절, 공현절, 대림절, 성령강림절과는 달리, 근대 미국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미국 개신교회 전통입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에 담긴 순수한 신앙을 존중하여, 한국교회는 교파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서 정교회와 서방교회(개신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성공회) 모두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는 전통도-흔히 정교회에서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 정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교회 교회력을 확인해보니 정교회도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합니다.-, 성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성육신의 신비를 느낄수 있는 전통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뭐..이신건 교수님께서 신학과 채플에서 석가탄일을 앞에 두고 불자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불자님의 자비를 배우자고 하셨거나 자비를 감사하자고 하셨든가요?? 잘은 기억이 안납니다만
비슷하게 말씀하신적이 있으셨지요.. 많은 학생들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쳐다봤더랬습니다만.
나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석가탄일이되면 부처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겨를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도 비슷하지 않겠나 싶은데요. 너무 나이브한가요??
어차피 주님도 귀있는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까요ㅋㅋ 생각할 자는 생각하겠지요??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뭐 성탄절이 성서적이냐 기독교적이냐는 대답은 뭐 쉽지 않을테니 간단히 제 주장을 피자면
성탄절에 대해 성서가 말하고 있지 않으니 비 성서적이라 치더라도
성탄절이 결정되던 과정 속에서 기독교의 신학적 사고가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게 아니든가요??
삼위일체가 수백년에 걸친 신학적 사고 속에서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온 것처럼
성서의 정경화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이 완성된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이 신학적 사고 속에서 가능한 것은 아니든가요?
그래서 신학이 또 필요한 게 아니든가요??
음..
어차피 성탄절 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리든 자신의 주장을 피셔서 동승하여 뭐 그러려니해도 그만이기도 하지요 뭐.. 저 역시 뭐 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거에요..
성탄절의 의미가 퇴색되어지는거야 뭐 성탄절 뿐은 아니니..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든..분명 조금이라도 진리를 향한 몸부림이 있다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다는 사실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임에는 분명한 거 같네요..
비슷하게 말씀하신적이 있으셨지요.. 많은 학생들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쳐다봤더랬습니다만.
나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석가탄일이되면 부처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겨를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도 비슷하지 않겠나 싶은데요. 너무 나이브한가요??
어차피 주님도 귀있는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까요ㅋㅋ 생각할 자는 생각하겠지요??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뭐 성탄절이 성서적이냐 기독교적이냐는 대답은 뭐 쉽지 않을테니 간단히 제 주장을 피자면
성탄절에 대해 성서가 말하고 있지 않으니 비 성서적이라 치더라도
성탄절이 결정되던 과정 속에서 기독교의 신학적 사고가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게 아니든가요??
삼위일체가 수백년에 걸친 신학적 사고 속에서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온 것처럼
성서의 정경화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이 완성된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이 신학적 사고 속에서 가능한 것은 아니든가요?
그래서 신학이 또 필요한 게 아니든가요??
음..
어차피 성탄절 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리든 자신의 주장을 피셔서 동승하여 뭐 그러려니해도 그만이기도 하지요 뭐.. 저 역시 뭐 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거에요..
성탄절의 의미가 퇴색되어지는거야 뭐 성탄절 뿐은 아니니..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든..분명 조금이라도 진리를 향한 몸부림이 있다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다는 사실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임에는 분명한 거 같네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역사는 자신이 속한 지역문화를 흡수하여 새로운 교회전통을 만들어내는 토착화의 역사입니다. 그 실례로 성탄절은 그리스도교가 로마문화에 흡수된 게 아니라, 로마문화가 그리스도교에 흡수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성서를 읽고 이를 설교하는 말씀전례도 유대문화가 그리스도교에 흡수된 것이고, 개신교의 추도예배, 가톨릭과 성공회의 그리스도교방식의 제사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전통문화를 그리스도교가 흡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다른 종교와 전통문화를 흡수하여 새로운 교회전통을 만드는 토착화가 진행될 때 그리스도교에 대해 한국인들이 친숙함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토착화와 더불어 진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신학의 토착화입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에서는 서구교회 전통이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한국교회 고유전통을 만드려는 토착화시도는 거부감을 갖거나 극렬히 반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실례로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전례가 간소화되고, 지역문화에 맞게 변형될 수 있음을 인정했음에도 로마교황청에서 놀랄 정도로 가톨릭의 전통적인 전례가 고집되고 있으며, 개신교에서는 고 변선환 박사가 감리교회에서 출교당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근본주의 신학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 예수와 바울로의 십자가신학에 어긋나는 미국제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성공회에서도 고 대천덕 신부님이 한국의 전통의상인인 두루마기를 교회력 절기 성격에 맞게 정해진 예전색에 맞추어 입자는 전례토착화가 주장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망토양식의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하고 있고요.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토착화와 더불어 진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신학의 토착화입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에서는 서구교회 전통이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한국교회 고유전통을 만드려는 토착화시도는 거부감을 갖거나 극렬히 반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실례로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전례가 간소화되고, 지역문화에 맞게 변형될 수 있음을 인정했음에도 로마교황청에서 놀랄 정도로 가톨릭의 전통적인 전례가 고집되고 있으며, 개신교에서는 고 변선환 박사가 감리교회에서 출교당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근본주의 신학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 예수와 바울로의 십자가신학에 어긋나는 미국제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성공회에서도 고 대천덕 신부님이 한국의 전통의상인인 두루마기를 교회력 절기 성격에 맞게 정해진 예전색에 맞추어 입자는 전례토착화가 주장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망토양식의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하고 있고요.
몰 교수나 판 교수가 거시적인 담론에서는 "생태, 생명 "에 관해서는
같은 관점이라는 말씀이군요
한 시대를 살아오고 살아가는 노신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잘 모르지만 ...)
이미 오래전에 (1985)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 이란 저서를 통해서 지구의 생태적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을 요청한 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 기독교 신학이 '지구 생태적 위기"를 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을 회피 하는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노 여신학자인 쉘리 맥훼이그 의 신학의 패러다임 전횐을 외침은
시대적 예언적 소리로 알고 있습니다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을 요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관점이라는 말씀이군요
한 시대를 살아오고 살아가는 노신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잘 모르지만 ...)
이미 오래전에 (1985)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 이란 저서를 통해서 지구의 생태적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을 요청한 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 기독교 신학이 '지구 생태적 위기"를 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을 회피 하는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노 여신학자인 쉘리 맥훼이그 의 신학의 패러다임 전횐을 외침은
시대적 예언적 소리로 알고 있습니다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을 요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도 그 의미를 모른채 설레여하고요.
저또한 지금은 덜하지만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괜시레 마음이 들떴습니다.
그런 이벤트성 분위기에만 휩쓸려 그 참된 의미를 놓치면 안되겠지만,
현실적으로 현재의 성탄절 문화에 반대하는 것이
1. 어떤 의미가 있는지
2. (의미가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같이 어울리고 즐거워하면서도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놓치고만 있지 않다면
그것으로 되지 않을까요. 그 중심된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 행동으로 들어나
면 더욱 좋고요.
현재의 성탄절이 그 중심에서 많이 멀어진 것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문화를 단순하게 비성서적이다.라고 쉽게 단정내릴 수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단순하게 맞다 아니다에 들어갈만한 성질의 내용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이 다비아가 시류에 휩쓸리고 있다는 근거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는 진행되는 운동이지 도달한 목표가 아니겠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