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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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근본주의와 진보기독교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왼쪽에 계신 분들께
좀 미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또한 둘은 같은 점 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요즘 기복주의 신앙이 설득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높은 뜻 숭의교회나 삼일교회가 주장하는 성공주의와 청부와 고지론 등을
들 수 있다. 성공을 하고 부자가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유치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는 꽤나 새삼스러워서 접기로 하자.
이와 양태는 다르지만 진보기독교에서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운동이다. 사회변화 즉
인권의 성장, 양극화 해소, 환경복원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을 가지고 곧 하나님 나라에 접근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복지국가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역사적 진보가 역사적 예수와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돌로 떡을 만들지 않은 예수의 정신과 배치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물로서 받는 세례의 한계를 직시하지 못함이며, 비약한다면 은삼십의 액면가에
예수를 세상적 메시야로 추대하며 모험을 했던 가롯유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역사적 예수일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의 구체성은 케리그마 예수 보다
피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긴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책임한 방관론이나 패배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이상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곧 절대의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좀 미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또한 둘은 같은 점 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요즘 기복주의 신앙이 설득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높은 뜻 숭의교회나 삼일교회가 주장하는 성공주의와 청부와 고지론 등을
들 수 있다. 성공을 하고 부자가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유치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는 꽤나 새삼스러워서 접기로 하자.
이와 양태는 다르지만 진보기독교에서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운동이다. 사회변화 즉
인권의 성장, 양극화 해소, 환경복원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을 가지고 곧 하나님 나라에 접근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복지국가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역사적 진보가 역사적 예수와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돌로 떡을 만들지 않은 예수의 정신과 배치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물로서 받는 세례의 한계를 직시하지 못함이며, 비약한다면 은삼십의 액면가에
예수를 세상적 메시야로 추대하며 모험을 했던 가롯유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역사적 예수일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의 구체성은 케리그마 예수 보다
피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긴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책임한 방관론이나 패배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이상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곧 절대의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제가 쓴 글은 정목사님이 누차 하신 말씀들이고 솔직히 새로울 것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식상하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글을 쓰는 건 순전히 복습차원이랍니다. 일종의 확인사살이라고나 할
까요? 찬선님이 말씀하신 우려의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구요. 댓글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찬선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목사님 신학 흉내내기도 솔직히 저도
벅차답니다. 지금은 중도정통( 이런 표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편의상 씁니다. 실지로 칼바르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민중신학과 정통신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고자
하는 과정이구요.
그 과정에서 다른 신학사조나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의 언급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식상하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글을 쓰는 건 순전히 복습차원이랍니다. 일종의 확인사살이라고나 할
까요? 찬선님이 말씀하신 우려의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구요. 댓글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찬선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목사님 신학 흉내내기도 솔직히 저도
벅차답니다. 지금은 중도정통( 이런 표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편의상 씁니다. 실지로 칼바르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민중신학과 정통신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고자
하는 과정이구요.
그 과정에서 다른 신학사조나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의 언급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확인사살이라고 하시니 ㅎ
저도 어디다가 이런 생각을 풀어낼데가 없어서 글로 쓰고 싶어 미칠 때도 있지만, 콰미님이 제 몫까지 늘 해주시는군요.
전화상의 그 부드럽고 온유하게 느껴지는 말투로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우신 콰미님.
저는 더구나 지금 사역교회가 합동교단이라서 더욱 조심하고 또 조심하려고 합니다.
요 바로 전의 교회에서는 CCC에서 오랜 기간 훈련 받은 여성 청년들과 논쟁도 좀 했지요.
뭐 지금은 신년을 맞아 장학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등을 따로 작정하는 것 때문에 아주 짜증이 납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정목사님을 비롯해 여기 다비안께서 잘 알고 계시는 십일조의 문제와 사용처에 대한 회의겠지만요.
저도 어디다가 이런 생각을 풀어낼데가 없어서 글로 쓰고 싶어 미칠 때도 있지만, 콰미님이 제 몫까지 늘 해주시는군요.
전화상의 그 부드럽고 온유하게 느껴지는 말투로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우신 콰미님.
저는 더구나 지금 사역교회가 합동교단이라서 더욱 조심하고 또 조심하려고 합니다.
요 바로 전의 교회에서는 CCC에서 오랜 기간 훈련 받은 여성 청년들과 논쟁도 좀 했지요.
뭐 지금은 신년을 맞아 장학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등을 따로 작정하는 것 때문에 아주 짜증이 납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정목사님을 비롯해 여기 다비안께서 잘 알고 계시는 십일조의 문제와 사용처에 대한 회의겠지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 해보면
"역사적 예수의 구체성은 케리그마 예수 보다 피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단칼에 무 자르듯 확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요. 역사적예수 문제는
100년 넘는 연구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활발하게 연구되는 문제 이지요
여기 혹시 전공자가 계시면 도움되는 답변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예수 문제를 ...
그리고 "환경복원 운동" 이란 말이 요즘의 환경운동과 생태신학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생태신학을 "하느님나라 운동"의 하나로 오해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른바 환경운동"이 "하느님나라" 운동이나 ,, 일반적인 사회적 운동은 아닙니다
제가 설명하기는 역 부족이라 아주 따끈한 글 " 생태적회심 과 창조세계의 회복"
(기독교사상 2009/1 p210 전현석 교수) 을 소개 합니다.
그리고 "절대의존" 이란 말에서 "절대" 란 인간 편에 쓸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슐라이마허" 의 종교 본질을 말하는 "절대 의존 감정"(?) 을 말 한것은 아니겟지만
"절대 의존"이란 인간은 결코 도달 될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과 글로는 가능하지만....
제가 이해가 부족한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본질이 '절대 의존"을 말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구체성은 케리그마 예수 보다 피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단칼에 무 자르듯 확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요. 역사적예수 문제는
100년 넘는 연구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활발하게 연구되는 문제 이지요
여기 혹시 전공자가 계시면 도움되는 답변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예수 문제를 ...
그리고 "환경복원 운동" 이란 말이 요즘의 환경운동과 생태신학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생태신학을 "하느님나라 운동"의 하나로 오해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른바 환경운동"이 "하느님나라" 운동이나 ,, 일반적인 사회적 운동은 아닙니다
제가 설명하기는 역 부족이라 아주 따끈한 글 " 생태적회심 과 창조세계의 회복"
(기독교사상 2009/1 p210 전현석 교수) 을 소개 합니다.
그리고 "절대의존" 이란 말에서 "절대" 란 인간 편에 쓸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슐라이마허" 의 종교 본질을 말하는 "절대 의존 감정"(?) 을 말 한것은 아니겟지만
"절대 의존"이란 인간은 결코 도달 될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과 글로는 가능하지만....
제가 이해가 부족한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본질이 '절대 의존"을 말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절대의존" 이란 말이 번역어인지 혹은 조어인지 모르지만
내가 이해 하기는 인간편에서 하느님에게 맡기는 행위(관념?) 같은데
인간의 행위는 "절대" [100 %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 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현상(실존)은 늘 불가지 하고 , 불신앙적이고 불안한 상황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분의 말 처럼 "도상의 실존' 이다 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결단 속에서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편에서 하느님에게 절대적인 표현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이름 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하느님 이름을 잊어버리고
"주" 님이란 말로 불렀다고 하듯이 하느님 앞에 인간은 부족 그 자체가 아닐가요?
설혹 절대 의존 상황이 된 상황이라도 늘 의심하고 배반 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요?
대표적인 인물이 베드로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절대 의존 이란 말을 잘못(부족하게) 이해 했는지 모르겟내요
그리고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표현 할 능력이 없어서 횡성 수설 아닌가 모르겟내요
공부를 더 해야겟지요
내가 이해 하기는 인간편에서 하느님에게 맡기는 행위(관념?) 같은데
인간의 행위는 "절대" [100 %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 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현상(실존)은 늘 불가지 하고 , 불신앙적이고 불안한 상황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분의 말 처럼 "도상의 실존' 이다 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결단 속에서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편에서 하느님에게 절대적인 표현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이름 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하느님 이름을 잊어버리고
"주" 님이란 말로 불렀다고 하듯이 하느님 앞에 인간은 부족 그 자체가 아닐가요?
설혹 절대 의존 상황이 된 상황이라도 늘 의심하고 배반 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요?
대표적인 인물이 베드로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절대 의존 이란 말을 잘못(부족하게) 이해 했는지 모르겟내요
그리고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표현 할 능력이 없어서 횡성 수설 아닌가 모르겟내요
공부를 더 해야겟지요
주제의 뜻을 벗어난 다른 말에 의논이내요
그런데 "절대의존"이란 말이 내가 난독인지 모르지만
"수동적" (하느님이 붙잡는) 으로는 느껴지지 않내요
"능동적"(인간의 노력) 으로 보이내요 혹시 "절대의존" 이란 말이 ...
만약 "슐라이마허" 의 "절대의존 감정" 이란 개념을 차용 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식 번역이 아닌지 모르겟내요
어느 신학자 분의 "신앙은 붙잡힘(grasp)" 이다 라는 말을 햇지요 (폴 틸릭인지 가물 가물 ?)
어쩌면 하느님의 손에 "붙잡힘"을 당하는 것이지요 이 말과 "절대의존"이란 말은 다르다고 봅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 이지만 바르트와 브르너의 인식 차이인 "특수계시"와 "일반계시" 에서
여러가지 상황으로 브르너 '일반계시' 가 빛을 못 본것은 생태적 관심을 가지고 잇는 제게는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세하고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에 브르너의 일반계시도 빛을 보았더라면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 신학" 이
상당히 완화 되지 않았을가? 생각 해 봅니다.
인식의 차이가 지구 역사를 바꾸어 놓는 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이제 제 경우는 논의를 끝내겠습니다. 더 이상 실력의 한계로 논 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혹시 관심있는 전문가 분이 더 설명 해 주시면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그런데 "절대의존"이란 말이 내가 난독인지 모르지만
"수동적" (하느님이 붙잡는) 으로는 느껴지지 않내요
"능동적"(인간의 노력) 으로 보이내요 혹시 "절대의존" 이란 말이 ...
만약 "슐라이마허" 의 "절대의존 감정" 이란 개념을 차용 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식 번역이 아닌지 모르겟내요
어느 신학자 분의 "신앙은 붙잡힘(grasp)" 이다 라는 말을 햇지요 (폴 틸릭인지 가물 가물 ?)
어쩌면 하느님의 손에 "붙잡힘"을 당하는 것이지요 이 말과 "절대의존"이란 말은 다르다고 봅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 이지만 바르트와 브르너의 인식 차이인 "특수계시"와 "일반계시" 에서
여러가지 상황으로 브르너 '일반계시' 가 빛을 못 본것은 생태적 관심을 가지고 잇는 제게는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세하고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에 브르너의 일반계시도 빛을 보았더라면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 신학" 이
상당히 완화 되지 않았을가? 생각 해 봅니다.
인식의 차이가 지구 역사를 바꾸어 놓는 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이제 제 경우는 논의를 끝내겠습니다. 더 이상 실력의 한계로 논 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혹시 관심있는 전문가 분이 더 설명 해 주시면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진보기독교에서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운동이다. 사회변화 즉
인권의 성장, 양극화 해소, 환경복원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을 가지고 곧 하나님 나라에 접근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복지국가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콰미님이 지적하신 위의 내용. 저도 동의 합니다.
물론 이런 부분은 마땅히 지향해야할 점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말이죠
한알의 겨자씨에 농부도 모르게 열매가 맺히듯이 말입니다.
콰미님 글 잘 읽었습니다.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운동이다. 사회변화 즉
인권의 성장, 양극화 해소, 환경복원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을 가지고 곧 하나님 나라에 접근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복지국가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콰미님이 지적하신 위의 내용. 저도 동의 합니다.
물론 이런 부분은 마땅히 지향해야할 점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말이죠
한알의 겨자씨에 농부도 모르게 열매가 맺히듯이 말입니다.
콰미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정목사님도 근본주의와 사회운동을 동일선상에서 종종 비판하셨길래
처음 한두문장을 읽고 '같은 취지의 글인가?'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같은 취지의 글이 아니라면 아니고요.
같은 취지의 글이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콰미님도 오랫동안 다비아에서 영향을 받아 오셨기에,
정목사님의 신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독창적인 생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판단을 유보하고요.
가끔씩 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것이에요.
다비아에서 너무 같은 목소리가 나오는 것 말이지요.
불필요한 논의나 이미 정리가 된 내용은 교통정리 할 필요가 있지만요.
그렇지않고 우리의 신앙을 발전적으로 일으켜 세울 논의는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정목사님을 뛰어넘는 신학자도 다비아에서 나와야 하고요.
이것은 분명 신학을 하시는 분의 몫이라고 봐요. 저같은 평신도는 아니지요.
정목사님이 가르치시는 것도 헉헉 대고 따라가는 입장이지만
정목사님을 정(正)으로, 누군가를 반(反)으로 해서
합(合)으로 이루어지는 발전도 이루어져야 할텐데 이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않고 읽으시는 거죠?^^
글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요즘 느끼시는 것들을 편하게 적어 내려가시는
것도 필요하지요.
저는 단지 콰미님의 글이 단초가 되어 제가 느끼는 것을 얘기하고 일을 뿐이에요.
콰미님, 삶에서님, 봄볕님, 나미..
우리 젊은 신학도들이 지금은 모방의 단계에 있다고 해도 다비아를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