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성공주의와 사회운동

Views 1609 Votes 1 2008.12.30 12:33:30
관련링크 :  
||0||0근본주의와 진보기독교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왼쪽에 계신 분들께

좀 미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또한 둘은 같은 점 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요즘  기복주의 신앙이 설득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높은 뜻 숭의교회나  삼일교회가 주장하는 성공주의와 청부와 고지론 등을

들 수 있다.  성공을 하고 부자가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유치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는 꽤나 새삼스러워서 접기로 하자.

이와  양태는 다르지만 진보기독교에서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운동이다.  사회변화  즉

인권의 성장, 양극화 해소, 환경복원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을 가지고 곧 하나님 나라에 접근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복지국가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역사적 진보가  역사적 예수와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돌로 떡을 만들지 않은 예수의 정신과  배치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물로서 받는 세례의 한계를 직시하지 못함이며,  비약한다면  은삼십의 액면가에

예수를 세상적 메시야로 추대하며 모험을 했던 가롯유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역사적 예수일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의 구체성은 케리그마 예수 보다

피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긴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책임한 방관론이나 패배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이상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곧 절대의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박찬선

2008.12.30 13:53:06
*.109.153.23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목사님도 근본주의와 사회운동을 동일선상에서 종종 비판하셨길래
처음 한두문장을 읽고 '같은 취지의 글인가?'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같은 취지의 글이 아니라면 아니고요.
같은 취지의 글이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콰미님도 오랫동안 다비아에서 영향을 받아 오셨기에,
정목사님의 신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독창적인 생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판단을 유보하고요.

가끔씩 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것이에요.
다비아에서 너무 같은 목소리가 나오는 것 말이지요.
불필요한 논의나 이미 정리가 된 내용은 교통정리 할 필요가 있지만요.
그렇지않고 우리의 신앙을 발전적으로 일으켜 세울 논의는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정목사님을 뛰어넘는 신학자도 다비아에서 나와야 하고요.
이것은 분명 신학을 하시는 분의 몫이라고 봐요. 저같은 평신도는 아니지요.

정목사님이 가르치시는 것도 헉헉 대고 따라가는 입장이지만
정목사님을 정(正)으로, 누군가를 반(反)으로 해서
합(合)으로 이루어지는 발전도 이루어져야 할텐데 이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않고 읽으시는 거죠?^^
글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요즘 느끼시는 것들을 편하게 적어 내려가시는
것도 필요하지요.
저는 단지 콰미님의 글이 단초가 되어 제가 느끼는 것을 얘기하고 일을 뿐이에요.

콰미님, 삶에서님, 봄볕님, 나미..
우리 젊은 신학도들이 지금은 모방의 단계에 있다고 해도 다비아를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콰미

2008.12.30 14:29:53
*.54.206.24

그렇습니다. 제가 쓴 글은 정목사님이 누차 하신 말씀들이고 솔직히 새로울 것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식상하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글을 쓰는 건 순전히 복습차원이랍니다. 일종의 확인사살이라고나 할

까요? 찬선님이 말씀하신 우려의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구요. 댓글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찬선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목사님 신학 흉내내기도 솔직히 저도

벅차답니다. 지금은 중도정통( 이런 표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편의상 씁니다. 실지로 칼바르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민중신학과 정통신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고자

하는 과정이구요.

그 과정에서 다른 신학사조나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의 언급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profile

김재남

2008.12.30 17:51:31
*.102.80.216

형님께서 느끼시는 두려움, 많은 분들이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비아에서 정목사님과 같은 소리가 자주 나온다는 것.
콰미님의 말씀처럼 그나마 쉽지 않은 일이죠^^
반(反)의 행위을 어떤식으로 진척시켜 나갈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모두 그 미끄러지는 세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합(合)이 아닐까 합니다.
신학 또한 가설이라는 한 어르신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사설로 지난 모임은 곤욕이었습니다...ㅡㅡ 전 행사하기엔 참 글러먹었습니다.
profile

다미아니

2008.12.30 19:27:37
*.33.197.99

확인사살이라고 하시니 ㅎ

저도 어디다가 이런 생각을 풀어낼데가 없어서 글로 쓰고 싶어 미칠 때도 있지만, 콰미님이 제 몫까지 늘 해주시는군요.
전화상의 그 부드럽고 온유하게 느껴지는 말투로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우신 콰미님.

저는 더구나 지금 사역교회가 합동교단이라서 더욱 조심하고 또 조심하려고 합니다.

요 바로 전의 교회에서는 CCC에서 오랜 기간 훈련 받은 여성 청년들과 논쟁도 좀 했지요.

뭐 지금은 신년을 맞아 장학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등을 따로 작정하는 것 때문에 아주 짜증이 납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정목사님을 비롯해 여기 다비안께서 잘 알고 계시는 십일조의 문제와 사용처에 대한 회의겠지만요.

profile

바우로

2008.12.30 20:47:44
*.62.26.5

올려주신글을 잘 읽었습니다.
profile

바우로

2008.12.30 20:49:26
*.62.26.5

참, 님의 글을 제 블로그에 발췌하도록 하겠습니다.물론 복사가 아니라, 인용입니다.

삶에서..

2008.12.31 02:14:36
*.140.184.104

염려와 걱정해주시는 것만큼은 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신학함이라는 자리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위한 새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엄밀한 신학함 속에 새로운 목소리도 내볼 수 있는 신학도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8년도 이제 하루가 채 남지 않았네요..

평민

2008.12.31 11:13:18
*.90.49.136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 해보면
"역사적 예수의 구체성은 케리그마 예수 보다 피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단칼에 무 자르듯 확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요. 역사적예수 문제는
100년 넘는 연구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활발하게 연구되는 문제 이지요
여기 혹시 전공자가 계시면 도움되는 답변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예수 문제를 ...

그리고 "환경복원 운동" 이란 말이 요즘의 환경운동과 생태신학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생태신학을 "하느님나라 운동"의 하나로 오해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른바 환경운동"이 "하느님나라" 운동이나 ,, 일반적인 사회적 운동은 아닙니다
제가 설명하기는 역 부족이라 아주 따끈한 글 " 생태적회심 과 창조세계의 회복"
(기독교사상 2009/1 p210 전현석 교수) 을 소개 합니다.

그리고 "절대의존" 이란 말에서 "절대" 란 인간 편에 쓸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슐라이마허" 의 종교 본질을 말하는 "절대 의존 감정"(?) 을 말 한것은 아니겟지만
"절대 의존"이란 인간은 결코 도달 될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과 글로는 가능하지만....
제가 이해가 부족한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본질이 '절대 의존"을 말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콰미

2008.12.31 12:01:01
*.54.206.24

평민님~ 절대라는 말을 인간 편에서 쓸 수 없다고 하셨는데 좀 새삼스럽다고 생각은 안드시나요?

절대타자, 절대의존 이런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단어선택이잖아요

좀 더 나아가면 개혁신학, 정통신학은 다 모순덩어리지요?

왜냐면 절대적 신을 상정하니까요

평민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불가지론자 혹은 회의주의자여야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한 바울 어거스틴 칼빈 루터 바르트 .... 절대 의존을 신학의 중심에서 빼놓은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profile

유니스

2008.12.31 12:47:03
*.104.195.74

위 세분의 답글이 여러가지를 놓치지않게도 하시고
보완과 해결의 화답도 하시는 거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평민

2008.12.31 20:57:26
*.90.49.136

" 절대의존" 이란 말이 번역어인지 혹은 조어인지 모르지만
내가 이해 하기는 인간편에서 하느님에게 맡기는 행위(관념?) 같은데
인간의 행위는 "절대" [100 %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 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현상(실존)은 늘 불가지 하고 , 불신앙적이고 불안한 상황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분의 말 처럼 "도상의 실존' 이다 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결단 속에서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편에서 하느님에게 절대적인 표현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이름 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하느님 이름을 잊어버리고
"주" 님이란 말로 불렀다고 하듯이 하느님 앞에 인간은 부족 그 자체가 아닐가요?
설혹 절대 의존 상황이 된 상황이라도 늘 의심하고 배반 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요?

대표적인 인물이 베드로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절대 의존 이란 말을 잘못(부족하게) 이해 했는지 모르겟내요
그리고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표현 할 능력이 없어서 횡성 수설 아닌가 모르겟내요
공부를 더 해야겟지요

콰미

2009.01.01 03:21:13
*.54.206.24

절대의존은 인간이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가 아니랍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가 절대의존이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인간의 가능성 중에

하나겠지요? 바로 하나님이 나를 붙잡는 것이지요 .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별차이 없어

보일 수도 있겠네요 . 마치 바르트와 부르너가 절대타자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인간의 인식 가능성을 놓고 관점의 차이를 보였던 것처럼 말이죠

평민님 덕분에 어설프게 다비아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꾸역 꾸역 튀어나오는군요

평민

2009.01.01 20:20:46
*.90.49.136

주제의 뜻을 벗어난 다른 말에 의논이내요
그런데 "절대의존"이란 말이 내가 난독인지 모르지만
"수동적" (하느님이 붙잡는) 으로는 느껴지지 않내요
"능동적"(인간의 노력) 으로 보이내요 혹시 "절대의존" 이란 말이 ...
만약 "슐라이마허" 의 "절대의존 감정" 이란 개념을 차용 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식 번역이 아닌지 모르겟내요

어느 신학자 분의 "신앙은 붙잡힘(grasp)" 이다 라는 말을 햇지요 (폴 틸릭인지 가물 가물 ?)
어쩌면 하느님의 손에 "붙잡힘"을 당하는 것이지요 이 말과 "절대의존"이란 말은 다르다고 봅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 이지만 바르트와 브르너의 인식 차이인 "특수계시"와 "일반계시" 에서
여러가지 상황으로 브르너 '일반계시' 가 빛을 못 본것은 생태적 관심을 가지고 잇는 제게는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세하고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에 브르너의 일반계시도 빛을 보았더라면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 신학" 이
상당히 완화 되지 않았을가? 생각 해 봅니다.
인식의 차이가 지구 역사를 바꾸어 놓는 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이제 제 경우는 논의를 끝내겠습니다. 더 이상 실력의 한계로 논 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혹시 관심있는 전문가 분이 더 설명 해 주시면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profile

김태완

2009.01.01 23:59:49
*.173.124.86

"...진보기독교에서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운동이다. 사회변화 즉
인권의 성장, 양극화 해소, 환경복원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을 가지고 곧 하나님 나라에 접근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복지국가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콰미님이 지적하신 위의 내용. 저도 동의 합니다.
물론 이런 부분은 마땅히 지향해야할 점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말이죠
한알의 겨자씨에 농부도 모르게 열매가 맺히듯이 말입니다.

콰미님 글 잘 읽었습니다.
List of Articles
No. Subject Author Date Views
3413 새해 행복하시기를 .... [1] 엘파소 별 Jan 02, 2009 1456
3412 카더라와 설교자 [41] 신완식 Jan 01, 2009 3212
3411 대구샘터교회 송구영신예배 후기 file [24] 유니스 Jan 01, 2009 9420
3410 내비게이터와 하나님 file [15] 시드니 Dec 31, 2008 1303
3409 아래 요ㅅㅔㅍ 님의 본 글입니다. [4] 운영자 Dec 31, 2008 1770
3408 [re] 제 글은 돌려주시면 어떨까요? 운영자 Dec 31, 2008 1142
3407 제 글은 돌려주시면 어떨까요? 요ㅤㅅㅔㅍ Dec 31, 2008 1045
3406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5] 바우로 Dec 31, 2008 1035
3405 다비아 겨울여행을 떠납니다 !! (보령/전주...) file [26] 소풍 Dec 31, 2008 2443
3404 “Angel at the Fence” file [13] 모래알 Dec 30, 2008 1765
3403 잔느 귀용의 "하나님과의 연합" (Union with God) 를... [10] 첫날처럼 Dec 30, 2008 2354
» 성공주의와 사회운동 [14] 콰미 Dec 30, 2008 1609
3401 함민복 에세이가 연재되고 있네요. [2] 박찬선 Dec 30, 2008 1360
3400 남은 달력 갖고 계신 분 [5] 정용섭 Dec 30, 2008 1520
3399 전운이 감도는 팔레스타인... [13] 닥터케이 Dec 29, 2008 166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