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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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 (명사) 언행이 어설프고 들떠서 미덥지 못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국어사전의 설명대로라면 어느 연령대에도 날라리로 불리우는 인간들은 존재해야 마땅하겠지만, 실제로는 뭔가 삐딱한 문제 청소년들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문제 청소년의 기준이 뭔지를 물으면 또 설명이 복잡해질 것이다. 비행을 저지르거나, 단체생활에 적응을 못하거나,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거나....
하지만 이 역시 현실 속에서는 설명과 규정이 무의미해진다. 날라리들은 그냥 딱 보면 티가 나기 때문이다. 머리가 길든 짧든, 행색이 깔끔하든 지저분하든 상관없이 첫인상에서 아, 네 녀석은 날라리로구나! 하고 느껴지는, 뭐랄까 날라리들만의 아우라가 있다고나 할까? 물론 아우라라는게 원래 보이는 자에게만 보이는 요상한 것이긴 하지만....
좀 더 유심히 살펴본다면 날라리들의 행색에 일관된 특징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자발적 불편함’ 이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범생이들이 불편함을 잘 참아내는 인간들이고 날라리들은 불편함을 못 견디는 인간들이어야 맞겠지만,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보면 날라리들이야말로 스스로 자처한 불편함을 일관된 의지로 묵묵히 감내하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발목이 빠져나온게 신기한 타이트한 쫄바지, 덜 자란 발목이 꺾일까 걱정스러운 하이힐, 코와 귀와 입술 언저리에 매단 각종 피어싱, 게다가 추운 겨울에도 걸치고 다니는 입성은 왜 그리도 하나같이 부실한지... 뽀다구를 위해서 안온함을 포기하는 결기야말로 날라리적 정체성의 핵심 덕목인 듯.
자발적 불편함의 역사를 되짚어보자면, 귀족님네들의 불편한 치장은 육체적 노동에서의 사면을 과시하는 상징이었고, 고행자들은 불편과 고통을 통해 더 큰 정신적 해방을 탐하였다 하니,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자발적 불편함을 감내하는 날라리들의 의지는 공부와 경쟁의 압박으로부터의 주체적 사면을 과시하려는 귀족적 선언일까, 아니면 현실의 번뇌를 자학을 통해 극복하려는 고행자적 비명일까?
**
가끔 교회에도 날라리들이 찾아온다.
교회야말로 모든 친구들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곳이어야 한다며 사탕문 소리를 해대기는 쉽지만, 막상 예고없이 날라리들이 들이닥치면 모두들 살짝 긴장하게 된다.
한참 전 일이지만, 막 학생부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평소 안면이 좀 있던 날라리 녀석 하나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선생니~임 저 예배드리러 왔시라요~~” 하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해대는데, 가만 살펴보니 혀만 꼬부라진게 아니라 눈동자도 다 풀려 있었다.
놀라서 다가가보니 어이쿠, 턱밑과 옷섶에는 누런 본드 국물이 죽죽 흘러내려 있는게 아닌가! 어디선가 본드를 불다가 환각중에 십자가라도 나타나서 교회로 달려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녀석의 옷섶을 끌어당겨 본드 묻은 면상에 쪽 붙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잠시나마 일었던 것도 같다.
물론 개중에는 조금 얌전한 날라리들이 별 무리 없이 학생부 친구들 사이에 연착륙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현재 우리 교회 학생부 모임에 자주 놀러오는 (차마 예배드리러 온다는 표현은 못 쓰겠다) 두어명의 중딩 여자아이들은 객관적인 기준으로는 분명 날라리에 속하지만 나름대로 교회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논다. 지난 여름 캠프때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려고 식당으로 라이터를 찾으러 가려니까 그 중 한 녀석이 “선생님, 저 라이터 있어요!”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백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건네주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통에, 어린 녀석이 왜 이딴 걸 가방에 가지고 다니느냐고 추궁을 하기에도 뻘쭘해서 아무 소리 못하고 말았었다.
***
지난 성탄절 전야의 일이다.
새벽송을 학생부에서 맡기로 한 까닭에 열댓명의 학생 녀석들과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두명의 낯선 녀석들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눈에도 견적이 딱 나오는, 순도 높은 날라리들이었다. 한 녀석은 파마끼가 남아있는 부수수한 장발머리에 무스를 잔뜩 발랐고, 다른 녀석은 코와 입술에 우스꽝스런 피어싱을 했다. 삼송역 인근에 사는 중딩 녀석들이라는데 저녁나절부터 형님들이 오토바이 폭주 뛰는 걸 따라다니다가 밤이 깊어지자 같은 반 아이들이 교회에서 밤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기억나서 교회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 물어서 알았지만, 중딩이 되기가 무섭게 이미 어른들이 염려하고 금하는 모든 불량스런 경험은 다 겪어버린, 인생의 진도를 오토바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뽑고들 계신 성질 급한 놈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하룻밤 잠을 좀 재워달라고 교회를 찾아왔으니 재워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갈등 모드 돌입....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늘이 바로 성탄 전야가 아니던가! 사면에 잠잘 곳이 없어 떨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헛간을 내어준 여관주인의 동정심을 칭송하는 연극을 수없이 지도하거나 보아온 내가 성탄의 밤에 잠자리를 청하는 날라리들을 어찌 추운 거리로 내 몰 수 있겠는가! (어쩌면 녀석들이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교회를 찾아온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녀석들은 참으로 치밀한 놈들일지도...)
새벽송 시간이 되자 녀석들을 남겨두고 떠나기가 영 꺼림직해서 “너희들도 같이 새벽송을 돌지 않으련~?” 하고 꼬드겨봤지만, 따라나설리 만무한 일. 결국 새벽송 가기를 귀찮아하는 몇몇 애들과 함께 녀석들을 학생부실에 남겨두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교회이므로 흡연을 한다거나 기타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엄중히 일렀더니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 아직은 애숭이 티가 역력한 너희들의 눈동자를 믿어보기로 하자꾸나.
세시간 가량의 새벽송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 학생부실을 열어보니 아이들은 모두 바닥에 퍼질러져 잠에 떨어져 있었다. 보일러를 뜨끈하게 올려놓고서는 장판바닥에 달라붙은 볼따구가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자니, 염려스럽던 마음은 사라지고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아무리 어른 흉내를 내고 다닌다 해도, 녀석들은 분명 베개도 이불도 없어도 저리도 달게 잘 수 있는 나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다. 방석을 말아 한놈 한놈 베개를 고여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뜨끈하게 푹 자거라. 잠잘때만큼은 모범생도 날라리도 없이, 그저 아직 잘 먹고 잘 자며 더 많이 자라야 할 십대들일 뿐이지 않느냐....
그제사 나도 피곤한 몸을 누였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어느새 녀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008년 성탄 전야에 지축리의 한 예배당을 찾아왔던 두명의 날라리들은 그저 짧고 따뜻한 잠을 한자락 때리고는 미명이 채 밝기가 무섭게 아침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천년 전 유대땅에서 만삭의 마리아가 요셉의 손을 의지하여 하룻밤 잠자리를 찾아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을을 헤매었다는 바로 그 새벽에 말이다.
****
그렇게 두명의 날라리들은 밤고양이처럼 잠시 다녀갔을 뿐이었지만, 나랑 같이 학생부 지도를 담당하고 있는 교육전도사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던 모양인지, 나에게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동안은 나의 관용적인 태도로 인해 그저 교회에 놀러 오는 아이들을 관망할수밖에 없었는데, 앞으로는 불량한 아이들이 교회를 드나드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원칙을 좀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며.
/ 날라리 대응 원칙이라... 글쎄,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하지요? 출입을 금지해야 하나요?
/ 물론 그런 아이들을 못 오게 막자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회는 놀러 오는 곳이 아니잖아요?
/ 그건 알지만, 어떻든 편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게....
/ 하지만 기존 아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도 생각을 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애들도 언젠가는 교회에 어울리는 학생들로 훈련시킨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
모든 아이들을 교회에 어울리는 아이들로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교회가 원하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를 수시로 구분해야 할 것이고, 그들에게 일관된 기준을 반복적으로 훈계, 또는 지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도사나 교사의 훈계와 지도로 과연 모든 아이들을 종교적 모범생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말은 그럴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의도는 교회가 요청하는 인간형에 부합하는 아이들만 남겨두고, 그 이외의 아이들은 단계적으로 배제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을런지....
그렇다고 지금처럼 무대책으로 방치하기에는 아무래도 직무유기같고....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했다.
*****
나는 지금 왜 아무런 감동도 교훈도 없는 날라리 이야기를 지루하게 주절거리고 있는가?
이유는 없다. 그냥 성탄 새벽에 만났던 그 친구들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다.
아니, 좀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주 야단맞을 소리가 되겠지만
명색이 어른이자, 교회의 학생부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나는 날라리로 불리우는 모든 아이들에게 일말의 경외감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히 내 이성과 감성은 책임있는 어른의 한사람으로서 저 아이들의 막막한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과, 저 아이들을 저런 상태로 몰아가는 이땅의 이런 저런 현실을 개탄해야 한다는 것과, 자식새끼를 저따위로 방치하는 무책임한 부모들의 면상이 궁금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댈 곳 없는 공허한 시간과 숨통을 조여오는 팍팍한 현실을 스스로 씩씩하게, 때로는 자신의 시간과 몸이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며 버텨내고 있는 수많은 날라리 녀석들의 삶의 방식이 가끔씩은 신비로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서두에서 말한 ‘날라리의 아우라’ 운운이 그저 속없는 농만은 아니다.
물론 그 경외감이 교횟집 아들로 태어나 본의 아니게 항상 과장된 모범생의 흉내를 내며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사람의 내면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일그러진 그림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날라리 : (명사) 언행이 어설프고 들떠서 미덥지 못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국어사전의 설명대로라면 어느 연령대에도 날라리로 불리우는 인간들은 존재해야 마땅하겠지만, 실제로는 뭔가 삐딱한 문제 청소년들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문제 청소년의 기준이 뭔지를 물으면 또 설명이 복잡해질 것이다. 비행을 저지르거나, 단체생활에 적응을 못하거나,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거나....
하지만 이 역시 현실 속에서는 설명과 규정이 무의미해진다. 날라리들은 그냥 딱 보면 티가 나기 때문이다. 머리가 길든 짧든, 행색이 깔끔하든 지저분하든 상관없이 첫인상에서 아, 네 녀석은 날라리로구나! 하고 느껴지는, 뭐랄까 날라리들만의 아우라가 있다고나 할까? 물론 아우라라는게 원래 보이는 자에게만 보이는 요상한 것이긴 하지만....
좀 더 유심히 살펴본다면 날라리들의 행색에 일관된 특징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자발적 불편함’ 이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범생이들이 불편함을 잘 참아내는 인간들이고 날라리들은 불편함을 못 견디는 인간들이어야 맞겠지만,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보면 날라리들이야말로 스스로 자처한 불편함을 일관된 의지로 묵묵히 감내하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발목이 빠져나온게 신기한 타이트한 쫄바지, 덜 자란 발목이 꺾일까 걱정스러운 하이힐, 코와 귀와 입술 언저리에 매단 각종 피어싱, 게다가 추운 겨울에도 걸치고 다니는 입성은 왜 그리도 하나같이 부실한지... 뽀다구를 위해서 안온함을 포기하는 결기야말로 날라리적 정체성의 핵심 덕목인 듯.
자발적 불편함의 역사를 되짚어보자면, 귀족님네들의 불편한 치장은 육체적 노동에서의 사면을 과시하는 상징이었고, 고행자들은 불편과 고통을 통해 더 큰 정신적 해방을 탐하였다 하니,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자발적 불편함을 감내하는 날라리들의 의지는 공부와 경쟁의 압박으로부터의 주체적 사면을 과시하려는 귀족적 선언일까, 아니면 현실의 번뇌를 자학을 통해 극복하려는 고행자적 비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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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교회에도 날라리들이 찾아온다.
교회야말로 모든 친구들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곳이어야 한다며 사탕문 소리를 해대기는 쉽지만, 막상 예고없이 날라리들이 들이닥치면 모두들 살짝 긴장하게 된다.
한참 전 일이지만, 막 학생부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평소 안면이 좀 있던 날라리 녀석 하나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선생니~임 저 예배드리러 왔시라요~~” 하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해대는데, 가만 살펴보니 혀만 꼬부라진게 아니라 눈동자도 다 풀려 있었다.
놀라서 다가가보니 어이쿠, 턱밑과 옷섶에는 누런 본드 국물이 죽죽 흘러내려 있는게 아닌가! 어디선가 본드를 불다가 환각중에 십자가라도 나타나서 교회로 달려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녀석의 옷섶을 끌어당겨 본드 묻은 면상에 쪽 붙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잠시나마 일었던 것도 같다.
물론 개중에는 조금 얌전한 날라리들이 별 무리 없이 학생부 친구들 사이에 연착륙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현재 우리 교회 학생부 모임에 자주 놀러오는 (차마 예배드리러 온다는 표현은 못 쓰겠다) 두어명의 중딩 여자아이들은 객관적인 기준으로는 분명 날라리에 속하지만 나름대로 교회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논다. 지난 여름 캠프때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려고 식당으로 라이터를 찾으러 가려니까 그 중 한 녀석이 “선생님, 저 라이터 있어요!”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백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건네주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통에, 어린 녀석이 왜 이딴 걸 가방에 가지고 다니느냐고 추궁을 하기에도 뻘쭘해서 아무 소리 못하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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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성탄절 전야의 일이다.
새벽송을 학생부에서 맡기로 한 까닭에 열댓명의 학생 녀석들과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두명의 낯선 녀석들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눈에도 견적이 딱 나오는, 순도 높은 날라리들이었다. 한 녀석은 파마끼가 남아있는 부수수한 장발머리에 무스를 잔뜩 발랐고, 다른 녀석은 코와 입술에 우스꽝스런 피어싱을 했다. 삼송역 인근에 사는 중딩 녀석들이라는데 저녁나절부터 형님들이 오토바이 폭주 뛰는 걸 따라다니다가 밤이 깊어지자 같은 반 아이들이 교회에서 밤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기억나서 교회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 물어서 알았지만, 중딩이 되기가 무섭게 이미 어른들이 염려하고 금하는 모든 불량스런 경험은 다 겪어버린, 인생의 진도를 오토바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뽑고들 계신 성질 급한 놈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하룻밤 잠을 좀 재워달라고 교회를 찾아왔으니 재워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갈등 모드 돌입....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늘이 바로 성탄 전야가 아니던가! 사면에 잠잘 곳이 없어 떨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헛간을 내어준 여관주인의 동정심을 칭송하는 연극을 수없이 지도하거나 보아온 내가 성탄의 밤에 잠자리를 청하는 날라리들을 어찌 추운 거리로 내 몰 수 있겠는가! (어쩌면 녀석들이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교회를 찾아온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녀석들은 참으로 치밀한 놈들일지도...)
새벽송 시간이 되자 녀석들을 남겨두고 떠나기가 영 꺼림직해서 “너희들도 같이 새벽송을 돌지 않으련~?” 하고 꼬드겨봤지만, 따라나설리 만무한 일. 결국 새벽송 가기를 귀찮아하는 몇몇 애들과 함께 녀석들을 학생부실에 남겨두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교회이므로 흡연을 한다거나 기타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엄중히 일렀더니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 아직은 애숭이 티가 역력한 너희들의 눈동자를 믿어보기로 하자꾸나.
세시간 가량의 새벽송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 학생부실을 열어보니 아이들은 모두 바닥에 퍼질러져 잠에 떨어져 있었다. 보일러를 뜨끈하게 올려놓고서는 장판바닥에 달라붙은 볼따구가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자니, 염려스럽던 마음은 사라지고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아무리 어른 흉내를 내고 다닌다 해도, 녀석들은 분명 베개도 이불도 없어도 저리도 달게 잘 수 있는 나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다. 방석을 말아 한놈 한놈 베개를 고여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뜨끈하게 푹 자거라. 잠잘때만큼은 모범생도 날라리도 없이, 그저 아직 잘 먹고 잘 자며 더 많이 자라야 할 십대들일 뿐이지 않느냐....
그제사 나도 피곤한 몸을 누였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어느새 녀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008년 성탄 전야에 지축리의 한 예배당을 찾아왔던 두명의 날라리들은 그저 짧고 따뜻한 잠을 한자락 때리고는 미명이 채 밝기가 무섭게 아침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천년 전 유대땅에서 만삭의 마리아가 요셉의 손을 의지하여 하룻밤 잠자리를 찾아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을을 헤매었다는 바로 그 새벽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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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명의 날라리들은 밤고양이처럼 잠시 다녀갔을 뿐이었지만, 나랑 같이 학생부 지도를 담당하고 있는 교육전도사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던 모양인지, 나에게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동안은 나의 관용적인 태도로 인해 그저 교회에 놀러 오는 아이들을 관망할수밖에 없었는데, 앞으로는 불량한 아이들이 교회를 드나드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원칙을 좀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며.
/ 날라리 대응 원칙이라... 글쎄,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하지요? 출입을 금지해야 하나요?
/ 물론 그런 아이들을 못 오게 막자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회는 놀러 오는 곳이 아니잖아요?
/ 그건 알지만, 어떻든 편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열어두는게....
/ 하지만 기존 아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도 생각을 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애들도 언젠가는 교회에 어울리는 학생들로 훈련시킨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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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이들을 교회에 어울리는 아이들로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교회가 원하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를 수시로 구분해야 할 것이고, 그들에게 일관된 기준을 반복적으로 훈계, 또는 지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도사나 교사의 훈계와 지도로 과연 모든 아이들을 종교적 모범생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말은 그럴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의도는 교회가 요청하는 인간형에 부합하는 아이들만 남겨두고, 그 이외의 아이들은 단계적으로 배제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을런지....
그렇다고 지금처럼 무대책으로 방치하기에는 아무래도 직무유기같고....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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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왜 아무런 감동도 교훈도 없는 날라리 이야기를 지루하게 주절거리고 있는가?
이유는 없다. 그냥 성탄 새벽에 만났던 그 친구들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다.
아니, 좀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주 야단맞을 소리가 되겠지만
명색이 어른이자, 교회의 학생부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나는 날라리로 불리우는 모든 아이들에게 일말의 경외감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히 내 이성과 감성은 책임있는 어른의 한사람으로서 저 아이들의 막막한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과, 저 아이들을 저런 상태로 몰아가는 이땅의 이런 저런 현실을 개탄해야 한다는 것과, 자식새끼를 저따위로 방치하는 무책임한 부모들의 면상이 궁금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댈 곳 없는 공허한 시간과 숨통을 조여오는 팍팍한 현실을 스스로 씩씩하게, 때로는 자신의 시간과 몸이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며 버텨내고 있는 수많은 날라리 녀석들의 삶의 방식이 가끔씩은 신비로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서두에서 말한 ‘날라리의 아우라’ 운운이 그저 속없는 농만은 아니다.
물론 그 경외감이 교횟집 아들로 태어나 본의 아니게 항상 과장된 모범생의 흉내를 내며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사람의 내면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일그러진 그림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네요.
저 역시 교회에서 날나리 고딩 시절을 보냈습니다.
교회 내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구요.
그 때, 담임 목사님의 눈물 겨운 사랑과 교회 친구들의 도움으로 벗어나게 되었죠.
지금 전도사로 사역하는 교회의 중고등부에도 좀 있더군요.
제가 고려인삼파로 부르는 애들인데, 제가 농담으로 "제발 인삼껌 좀 씹지 말고 자일리톨 씹어! 요새 맛도 다양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제가 그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인지,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더 애정을 갖게 되더라구요.
대학부 시절에는 길에서 담배 피우던 교회 청년을 속으로 비난했었는데, 이제야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의미를 아주 미약하게 나마 희미하게 알듯 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교회에서 날나리 고딩 시절을 보냈습니다.
교회 내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구요.
그 때, 담임 목사님의 눈물 겨운 사랑과 교회 친구들의 도움으로 벗어나게 되었죠.
지금 전도사로 사역하는 교회의 중고등부에도 좀 있더군요.
제가 고려인삼파로 부르는 애들인데, 제가 농담으로 "제발 인삼껌 좀 씹지 말고 자일리톨 씹어! 요새 맛도 다양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제가 그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인지,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더 애정을 갖게 되더라구요.
대학부 시절에는 길에서 담배 피우던 교회 청년을 속으로 비난했었는데, 이제야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의미를 아주 미약하게 나마 희미하게 알듯 하기도 합니다.
예전 학생회 임원을 맡고 있던 시절 졸업반인 고3 형님들이 교회에서 맥주파티를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말이죠. 한잔 줄테니까 이르지 말라는 형들의 애원을 간곡히 거절했습니
다. 왜냐면 저는 술을 못먹으니까요 ~ ㅎㅎ 고자질은 성격에 맞지 않고 어쩌겠어요?
미우나 고우나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분들인데요 지금도 만나면 당구치고 게임하고 별 생산성
없는 일들만 하지만 그래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분좋고 신나는 지 모르겠습니다.
소풍님은 날라리도 수용할 수 있는 날라리 선생님 ~
소풍님이 염려하던 그 젊은이들이 나중에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물론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말이죠. 한잔 줄테니까 이르지 말라는 형들의 애원을 간곡히 거절했습니
다. 왜냐면 저는 술을 못먹으니까요 ~ ㅎㅎ 고자질은 성격에 맞지 않고 어쩌겠어요?
미우나 고우나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분들인데요 지금도 만나면 당구치고 게임하고 별 생산성
없는 일들만 하지만 그래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분좋고 신나는 지 모르겠습니다.
소풍님은 날라리도 수용할 수 있는 날라리 선생님 ~
소풍님이 염려하던 그 젊은이들이 나중에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제목이 재미있어서 들어와 봤는데 저의 경험도 함께 나누고 싶군요.
저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친구들 중에 날나리에 가장 근접했던 친구들이 3명이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모두 대학졸업하고 나이 삽심이 넘어서 신학교 가고 목회자가 되었지요.
저의 이론에 의하면 소풍님의 글에 나온 인생경험 다해본 중딩들도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 상당히 높을 것 같습니다.
저의 이론에 의하면 인생경험을 미래 해본 친구들은 허무감을 먼저 느끼고 하나님을 찾게될 가능성이 더 높아지걸랑요.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목사된 친구들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날나리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더 귀엽고 편견없이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졸업한 후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인사하러 오는 친구들은 한 때 날나리 었던 친구들이 더 많거든요. 인생살이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저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친구들 중에 날나리에 가장 근접했던 친구들이 3명이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모두 대학졸업하고 나이 삽심이 넘어서 신학교 가고 목회자가 되었지요.
저의 이론에 의하면 소풍님의 글에 나온 인생경험 다해본 중딩들도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 상당히 높을 것 같습니다.
저의 이론에 의하면 인생경험을 미래 해본 친구들은 허무감을 먼저 느끼고 하나님을 찾게될 가능성이 더 높아지걸랑요.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목사된 친구들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날나리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더 귀엽고 편견없이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졸업한 후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인사하러 오는 친구들은 한 때 날나리 었던 친구들이 더 많거든요. 인생살이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사실, 요즘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데 교회에서 교사나 전도사가 훈계한다고 말 듣겠습니까...
괜히 어설프게 "교육"시키려는것보다는 따뜻한 밥이라도 한끼 먹이는게 더 나을듯합니다.
(밥보다는 복음이 먼저다...라고 항변하는 분도 있으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