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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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후서를 다 읽고 최근에 갈라디아서를 한 숨에 다 읽었습니다... 벅찬 감격이 느껴졌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할 만큼 강하고 자극적인 어조 속에서 바울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문제가 된 것은 "할례" 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아주 중대한 문제였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도 할례는 마찬가지의 중대성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은근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조했나 봅니다... 그러던 차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또 그런 이야기들에 귀가 솔깃해서 그 쪽으로 쏠린 것 같구요...
약간 쌩뚱맞은 건 바울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도록 했다는 것인데, 이건 할례라는 표면적인 문제 보다는 "할례" 라는 것의 상징성이 일으키는 심각한 복음의 왜곡이 포인트라는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바울이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권위가 어떤 사람에게서 온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사도와 선을 긋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 도중에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오니까 자리를 피하는 이중 플레이를 하다가 바울에게 비난을 당하는 내용도 나오구요. 고넬료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하나님께로부터 환상을 보았음에도 전혀 거리낌없이 행동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괴리감이란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 또한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 이란 것이 그 당시에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이었는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율법이 앞서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의 패턴 안으로 끌어와서 이해하려 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쭉 율법과 약속의 예를 통해서, 종과 자녀의 예를 통해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를 통해서 핵심 키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임을 강조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변증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를 절대적 자유와 생명으로 느끼고 있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존재 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가 하나의 율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바울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매우 궁금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패턴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지금의 기독교의 현실을 본다면 무어라고 말을 할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의미없이 만들어 버렸던 예수는 지금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어버렸고, 그 기준으로 교회는 선민이 되고 선민 아닌 사람들과는 은근히 선을 긋게 되고, 그 선민들은 그 선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할례" 를 요구받고 또한 그 짐을 자신들도 당연한 것인양 짊어지고 가는 현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예전부터 이 부분 말씀의 번역이 아주 썡뚱맞다는 생각을 했는데, 갈라디아서 3장 19-20 절에서 20 절 말씀은 암만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개자는 한 쪽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부분이 해석만도 100여가지가 넘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원어 성경을 보면서 그냥 글자 그대로 따라서 번역해보면...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이 것은 약속된 씨(후손: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을 위해서(범죄들의 항목을 늘이기 위해서) 추가되어진 것으로, 천사를 통하여 중개자의 손으로 지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개자는 한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것은 어쩌면 율법이란 것이 모세로 대표되긴 하지만, 한 사람에 의해서만 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 여러 중개자들을 통해서 덧붙여 진 것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앞 뒤 문맥으로 보아도 율법의 상대성과 유한성,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비교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공동번역의 번역이 멋집니다...
"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두서 없이 갈라디아서 읽은 소감을 적어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문제가 된 것은 "할례" 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아주 중대한 문제였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도 할례는 마찬가지의 중대성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은근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조했나 봅니다... 그러던 차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또 그런 이야기들에 귀가 솔깃해서 그 쪽으로 쏠린 것 같구요...
약간 쌩뚱맞은 건 바울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도록 했다는 것인데, 이건 할례라는 표면적인 문제 보다는 "할례" 라는 것의 상징성이 일으키는 심각한 복음의 왜곡이 포인트라는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바울이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권위가 어떤 사람에게서 온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사도와 선을 긋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 도중에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오니까 자리를 피하는 이중 플레이를 하다가 바울에게 비난을 당하는 내용도 나오구요. 고넬료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하나님께로부터 환상을 보았음에도 전혀 거리낌없이 행동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괴리감이란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 또한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 이란 것이 그 당시에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이었는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율법이 앞서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의 패턴 안으로 끌어와서 이해하려 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쭉 율법과 약속의 예를 통해서, 종과 자녀의 예를 통해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를 통해서 핵심 키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임을 강조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변증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를 절대적 자유와 생명으로 느끼고 있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존재 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가 하나의 율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바울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매우 궁금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패턴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지금의 기독교의 현실을 본다면 무어라고 말을 할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의미없이 만들어 버렸던 예수는 지금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어버렸고, 그 기준으로 교회는 선민이 되고 선민 아닌 사람들과는 은근히 선을 긋게 되고, 그 선민들은 그 선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할례" 를 요구받고 또한 그 짐을 자신들도 당연한 것인양 짊어지고 가는 현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예전부터 이 부분 말씀의 번역이 아주 썡뚱맞다는 생각을 했는데, 갈라디아서 3장 19-20 절에서 20 절 말씀은 암만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개자는 한 쪽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부분이 해석만도 100여가지가 넘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원어 성경을 보면서 그냥 글자 그대로 따라서 번역해보면...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이 것은 약속된 씨(후손: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을 위해서(범죄들의 항목을 늘이기 위해서) 추가되어진 것으로, 천사를 통하여 중개자의 손으로 지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개자는 한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것은 어쩌면 율법이란 것이 모세로 대표되긴 하지만, 한 사람에 의해서만 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 여러 중개자들을 통해서 덧붙여 진 것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앞 뒤 문맥으로 보아도 율법의 상대성과 유한성,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비교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공동번역의 번역이 멋집니다...
"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두서 없이 갈라디아서 읽은 소감을 적어보았습니다.
바울은 어쩌면 예수를 한 번 보지도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도 예수의 생명과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음을 직접 몸소 보여준 사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헬레니즘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우주적 그리스도로 변용했지만 큰 틀에서 예수의 진실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다는 생각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또한 복음서의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직접 눈 뜨고 보는 사람보다도,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의 눈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예수와 직접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보다도 바울이 예수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에 더 집중하고 있는 느낌이고, 이 점은 한국 교회가 깊이 깨달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헬레니즘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우주적 그리스도로 변용했지만 큰 틀에서 예수의 진실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다는 생각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또한 복음서의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직접 눈 뜨고 보는 사람보다도,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의 눈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예수와 직접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보다도 바울이 예수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에 더 집중하고 있는 느낌이고, 이 점은 한국 교회가 깊이 깨달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첫날처럼님~~
어제 밤에 첫날님의 갈라디아서 감상을 읽고
또한 읽어보라는 권유에
순진한 저는 어제밤과 오늘 아침에 걸쳐서 읽었습니다....ㅎㅎ
지난 연말에 정목사님께서 갈라디아서를 본문으로 설교하셨을 때
제 안의 바울 사도에 대한 억하심정들이 좀 풀려서인지
또한 새롭더라구요.
저의 새로운 소회는,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저술할 당시의
그의 심령의 주류가 시대를 관통하며
그것을 이어갈 것이라는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토라와 할례를 복음에서 생선가시를 발가내듯이
혹은 동물을 해부할 때 얇은 막을 발가내듯이 하려는
그의 심정이 보였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당시의 거대한 불법에 맞섰던
근거가 된 서신이 갈라디아서인 것도
이 서신의 영성과 이어진다는 생각....
오늘 날의 부풀어지고 강화되는 종교적 외식 즉 새로운 율법에도
이 서신서가 한 몫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반복을 하는군요.
토라와 율법, 구교의 타락한 외식, 오늘 날 신교의 모습..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압박에
'자유의 서신서'가 맞습니다.
정목사님의 작년 12월의 갈라디아서 설교를 듣고
마침 TV의 다큐 10+ 채널에서 '베드로와 바울, 세상 밖으로 나오다'를
보았습니다. 역사적 고증과 설명을 덧붙였는데
풍부한 영상과 나레이션으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무할례자들과 식사를 하다가 눈치껏 피하는 장면에서는
빵바구니가 날라가더군요..^^
첫날님, 감사~~~
어제 밤에 첫날님의 갈라디아서 감상을 읽고
또한 읽어보라는 권유에
순진한 저는 어제밤과 오늘 아침에 걸쳐서 읽었습니다....ㅎㅎ
지난 연말에 정목사님께서 갈라디아서를 본문으로 설교하셨을 때
제 안의 바울 사도에 대한 억하심정들이 좀 풀려서인지
또한 새롭더라구요.
저의 새로운 소회는,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저술할 당시의
그의 심령의 주류가 시대를 관통하며
그것을 이어갈 것이라는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토라와 할례를 복음에서 생선가시를 발가내듯이
혹은 동물을 해부할 때 얇은 막을 발가내듯이 하려는
그의 심정이 보였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당시의 거대한 불법에 맞섰던
근거가 된 서신이 갈라디아서인 것도
이 서신의 영성과 이어진다는 생각....
오늘 날의 부풀어지고 강화되는 종교적 외식 즉 새로운 율법에도
이 서신서가 한 몫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반복을 하는군요.
토라와 율법, 구교의 타락한 외식, 오늘 날 신교의 모습..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압박에
'자유의 서신서'가 맞습니다.
정목사님의 작년 12월의 갈라디아서 설교를 듣고
마침 TV의 다큐 10+ 채널에서 '베드로와 바울, 세상 밖으로 나오다'를
보았습니다. 역사적 고증과 설명을 덧붙였는데
풍부한 영상과 나레이션으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무할례자들과 식사를 하다가 눈치껏 피하는 장면에서는
빵바구니가 날라가더군요..^^
첫날님, 감사~~~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면
뛰어난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성서 낱권을 한꺼번에 읽는 게 참 중요한 성서읽기죠.
어쨌든지 우리는 바울이라는 인물에게
신앙적으로 진 빚이 많은 게 사실이에요.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오.
복음의 진수를 향한 그의 신학적 열정은
오늘도 빛이 납니다.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는 이들이
바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데,
그건 경솔한 생각이지요.
바울의 영성은 오늘에도 빛을 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