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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2009년 3월 25일)에서.
대한민국 제1호 고전음악감상실 녹향(綠鄕)이 끝내 문을 닫는다.
1946년 10월 중구 향촌동에서 문을 연 뒤 63년 만이다. 지난 22일 찾은 녹향의 분위기는 처한 상황만큼 낡고 무거웠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창가에만 봄햇살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었다. 처음 문을 열던 날부터 녹향을 지켜온 주인 이창수옹(88)은 휴일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오래전 땅을 팔아 구입한 영국제 스펜토리안 스피커에서는 공교롭게도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Time To Say Goodbye(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가 흐르고 있었다.
6·25전쟁 중 녹향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구에 머물렀던 양주동, 이중섭, 유치환, 양명문, 최정희 등 당대 최고의 문인·예술가들이 이곳 음악실에 죽치고 앉아 하루를 보냈다. 구석진 자리 어딘가에서 한국인의 애창가곡 '명태'의 가사가 만들어졌으며, 비운의 화가 이중섭은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이 시절 예술인들이 남긴 갖가지 일화와 흔적은 대구 문화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수많은 예술인과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출입으로 북적이던 녹향도 홈오디오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조락을 피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이더 많아졌다. 종업원을 내보내고, 주인이 직접 서빙을 하고, 그래도 어려워 10여 차례 장소를 옮겨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의 주도로 녹향을 살리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것도 반짝이었다.그동안 녹향은 순전히 이창수옹 가족의 희생으로 유지돼 왔다. 잘해야 하루 1~2명, 1인당 3천원의 입장료로는 매달 31만원의 임차료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창수옹의 6남매는 녹향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부친이 음악실에 기울이는 애정을 생각해 매달 기꺼이 임차료를 맡아 왔다. 하지만 최근 아들이 부도를 맞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녹향의 폐관 소식에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많다. 60대의 한 대구시민은 "녹향에서 음악을 들으며 젊음을 보냈다. 임차료가 없어 문을 닫는다니 가슴이 아프다. 대구시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박물관, 기념관 등을 짓는 것도 좋지만 우리 곁에 마지막까지 남은 근대유산을 지켜 주는 노력도 필요한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창수 대표는 "평생을 지켜온 음악실 문을 닫을 생각에 요즘 밤잠을 뒤척인다. 평생 손때가 묻은 LP, SP를 어디에다 처분해야 할 지도 막막하다. 누군가 작은 공간이라도 제공해주면 죽을 때까지 음악실을 지키고 싶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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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남일보를 보면서 눈을 의심했습니다... 옛날은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동성로에 밀려서 중심 자리를 내준 교동,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해있는 구 대구극장 대각선 맞은 편에 초라하게 있던 녹향이 이제 문을 닫는다고 하네요... 일단 그 기사를 스크랩해놓고 읽어보면서 뭔가 마음의 고향이 사라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한 편 누리기만 누리고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녹향은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사촌 누나랑 영화 보고 따라서 한 번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한 번씩 시간이 되면 하루 반나절씩 죽치고 있었던 음악 공간이었죠... 빨간 벽돌로된 벽에 오래된 창문, 중앙에 있는 화로... 그곳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춰 서버린듯,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와버린듯,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곳이었어요...
할아버지 한 분(이창수 옹)이 오셔서 "뭘 드시겠어요? 녹차 오렌지 쥬스 둘 중에 고르세요. " 하면 으례 오렌지 쥬스를 시켰고, 할어버지께서는 음악을 신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엘피도 되고 시디도 되고 다 된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저도 음악은 제목은 모르고 그냥 듣는대로 듣는터라 할아버지의 추천과 인도에 따라 듣곤 했습니다... 혼자 간 기억이 많네요... 그러면서 한 번씩은 친구를 데리고 가기도 했죠... 이상하게 그 곳은 마치 내밀한 지성소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가 깊이 오가게 하는 마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 번은 갔다가 앞에 있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멀리서 눈을 감고 들으시더니 한 번 여기서 봉사를 좀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말씀 하시더군요... 노인들 가곡 교실을 하는데 반주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어줍잖은 실력으로 하기가 부끄럽지만 마음으로는 정말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평일에는 시간이 안되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 하시면서 아쉬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평생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놈이 집사람을 만나서 눈이 뒤집혀 사귈 때, 꼭 한 번 녹향엘 데려가고 싶어서 대구역에서 내리는 사람을 바로 이끌고 녹향을 갔더랬습니다... 할아버지께 같이 인사 드리고, 이런 저런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했습니다... 의외로 집사람도 그 곳을 좋아하더라구요...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의 덕담을 들으며 너무 감사하다고 그냥 거스름돈은 안받겠다고 했더니 굳이 몇천원 내어주시더군요... 그러면서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방을 넌지시 보니 담요 하나 깔고 거의 기거를 하시면서 낡은 레코드 판을 자식 다루듯이 소중하게 닦고 계시더군요...
그게 마지막이었네요... 벌써 4년 전 일입니다...
마음이 왜 이렇게 안좋죠?
저는 '녹향'보다는 '필'에 가끔 갔었습니다.
이미 이곳도 사라졌어요.
위로 차원에서 보첼리의 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