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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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갑작스레 민박사님의 연락을 받고 오늘 옥천과 대전을 다녀왔습니다.
실수로 가게 된 옥천에서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방문했고
원래 목적지인 대전 산내 골령골은 오전 늦게 서야 가게 되었습니다.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초등학교 앞에서 옥천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으로 부터 59년 전 한국군에 의해 7천여 명이 집단 학살된 산내 골령골이 나옵니다.
산내학살사건은 92년 월간 "말"지에 의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공론화된 후 오랜 기간 또 다시
침묵해야 했습니다. 이후 99년 12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산내학살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지역사회단체의 진상조사와 유족들의 증언이 본격적으로 시작 됐습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문건은 50년 7월초 3일간 대전형무소 정치범 1천 8백명이 처형됐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 단체들은
열흘이 넘게 학살이 진행된 점, 유족들에 의한 제사가 7월초 순부터 중순까지 폭 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점
학살현장이 3곳으로 그 규모가 크다는 점 진상조사 결과를 토대로 최소 3천명 이상이 학살됐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 지의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위닝턴의
증언록은 학살의 규모를 7천명으로 명시했다. 증언록은 학살의 마지막 순간도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 전선을 돌파하자 , 7월 17일 새벽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다시 )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백 명씩 37대 트럭분, 3천 7백여 명이 죽었습니다.
결국 한국전쟁 발발 직후 6월 27일 대전으로 내려온 한국정부는 폭동을 일으키고 적을 도울 우려가 있는 사람에
대한 학살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7월초 3일간은 대전형무소 정치범 1천 8백여명이 집중 처형됐으며, 그 외
1천 이백여 명이 7월 1일부터 보름에 걸쳐 대대적으로 총살당했따. 또한 금강 전선이 무너지고 한국정부가 대구로
이전한 다음날인 7월 17일 새벽에 3천 7백여 명이 마지막으로 학살됐습니다.
산내학살 진상규명 활동 초기부터 결합했던 심규상씨는 정치범 보다는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이 학살된 규모가
더 크다라며 골령골은 좌익정치범들에 대한 처형지가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장소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학살의 기준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모호해졌다라며 나중에는 여성과 10대 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증언
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해마다 7월 8일 오전 10시부터 골령골에서는 대전산내학살희생자위령제가 열리는데 올 해에는 열리지 않았
습니다. 칠천여명이 학살된 장소에 꼭 하나의 묘비와 며칠 지난 국화 꽃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학살된 원혼에 대해서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시절 때도 그랬고 참여정부도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멍에는 아직도
고스란히 그들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 " 콰미씨에게 역사 공부를 좀 시켜줘야 겠다." 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했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용서할 수도 없는
그들의 원혼은 누가 달래준다는 것입니까?
죽음의 골짜기라 불리는 골령골에서 레퀘엠을 노래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7월은 여전히 푸르고 태양은 그 어느 때 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실수로 가게 된 옥천에서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방문했고
원래 목적지인 대전 산내 골령골은 오전 늦게 서야 가게 되었습니다.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초등학교 앞에서 옥천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으로 부터 59년 전 한국군에 의해 7천여 명이 집단 학살된 산내 골령골이 나옵니다.
산내학살사건은 92년 월간 "말"지에 의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공론화된 후 오랜 기간 또 다시
침묵해야 했습니다. 이후 99년 12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산내학살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지역사회단체의 진상조사와 유족들의 증언이 본격적으로 시작 됐습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문건은 50년 7월초 3일간 대전형무소 정치범 1천 8백명이 처형됐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 단체들은
열흘이 넘게 학살이 진행된 점, 유족들에 의한 제사가 7월초 순부터 중순까지 폭 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점
학살현장이 3곳으로 그 규모가 크다는 점 진상조사 결과를 토대로 최소 3천명 이상이 학살됐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 지의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위닝턴의
증언록은 학살의 규모를 7천명으로 명시했다. 증언록은 학살의 마지막 순간도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 전선을 돌파하자 , 7월 17일 새벽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다시 )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백 명씩 37대 트럭분, 3천 7백여 명이 죽었습니다.
결국 한국전쟁 발발 직후 6월 27일 대전으로 내려온 한국정부는 폭동을 일으키고 적을 도울 우려가 있는 사람에
대한 학살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7월초 3일간은 대전형무소 정치범 1천 8백여명이 집중 처형됐으며, 그 외
1천 이백여 명이 7월 1일부터 보름에 걸쳐 대대적으로 총살당했따. 또한 금강 전선이 무너지고 한국정부가 대구로
이전한 다음날인 7월 17일 새벽에 3천 7백여 명이 마지막으로 학살됐습니다.
산내학살 진상규명 활동 초기부터 결합했던 심규상씨는 정치범 보다는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이 학살된 규모가
더 크다라며 골령골은 좌익정치범들에 대한 처형지가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장소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학살의 기준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모호해졌다라며 나중에는 여성과 10대 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증언
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해마다 7월 8일 오전 10시부터 골령골에서는 대전산내학살희생자위령제가 열리는데 올 해에는 열리지 않았
습니다. 칠천여명이 학살된 장소에 꼭 하나의 묘비와 며칠 지난 국화 꽃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학살된 원혼에 대해서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시절 때도 그랬고 참여정부도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멍에는 아직도
고스란히 그들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 " 콰미씨에게 역사 공부를 좀 시켜줘야 겠다." 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했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용서할 수도 없는
그들의 원혼은 누가 달래준다는 것입니까?
죽음의 골짜기라 불리는 골령골에서 레퀘엠을 노래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7월은 여전히 푸르고 태양은 그 어느 때 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임기를 4개월여 남겨두고 사의를 표명한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이
오늘 위원장직에서 물러나며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말을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4729.html
하였는데 7천명의 원혼 뿐만 아니라 용서받고 용서하기를 기다리는
수 많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에게 그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갖어 봅니다.
오늘 위원장직에서 물러나며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말을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4729.html
하였는데 7천명의 원혼 뿐만 아니라 용서받고 용서하기를 기다리는
수 많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에게 그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갖어 봅니다.
여담이지만 한홍구의 "대한민국사"에 보면 한국전기간 한국군,미군에 의하여 (북한군이 아닙니다.) 직간접으로 학살된 사람의 숫자는 백만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좌익계열 제소자 뿐만아니라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으로 편성되있던 좌익성향의 사람들까지 수십만이 살해 되었으며 국민 방위군으로 징집되어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사람이 십여만명됩니다..(이건 직접 총을 쏴 죽이진 않았지만 준비부족,급식비 착복,의류비 착복등으로 실질적으로 살해하였으니 학살피해자 숫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잊지 않고 그 죽음에 답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