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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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만 가득한 사람들에 대한 조언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 주님, 저는 하나님께 얼마나 잘 보이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큰 헌신을 하고 평화를 누리고 싶은지 모릅니다. 정말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저는 정말 가난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거나 또 다른 경우는 “제가 이 곳이나 저 곳에 있기 전까지는, 또는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하기 전까지는 모든 일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떤 낯선 곳에, 수도원이나 은둔 수련 장소에 반드시 가서 살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온통 당신 자신에 관한 것일 뿐이지 다른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당신의 의지인데도 자신만 모르고 있거나,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당신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것은 전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이것을 멀리하고 다른 것을 추구한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것은 장소나, 사람들, 또는 삶의 방식이나, 환경, 또는 사업이 될 수도 있지만 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삶의 방식과 일들은 당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들 속에 있는 당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 속에서 당신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자기 조절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과 함께 시작하지만 당신 자신을 버리십시오. 진실로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다면, 어디를 향해 달려가든, 그 곳이 어디든 간에 당신은 장애물과 문제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외적인 것들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들은 - 그 외적인 것이 장소든, 삶의 방식이든, 사람들이든, 행위든, 고독이든, 가난이든, 낮아짐이든 간에 - 그런 일이 아무리 훌륭하고 또한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전히 그 것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니며 평화를 가져다주지도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은 완전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황이 깊어질수록, 그들은 찾는 것을 발견하기가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이미 길을 잃은 것처럼 이리 저리 다닙니다; 더 멀리 가면 갈수록, 더 길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자신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을 버린 그 때에야 그는 모든 것을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어떤 사람이 왕국과 온 세상을 버렸지만, 그 자신만은 부여잡고 있다면, 그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한술 더 뜨면,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을 버렸다면, 그가 어떤 것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 것이 재산이든, 명예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성 베드로가 이야기 한 것에 관해서 보자면, 그는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는데, 사실 그가 버린 것은 단순히 그물과 그의 작은 배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성인도 있습니다 : “ 어떤 사람이 기꺼이 작은 무언가를 버린다면, 그의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닐지라도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또한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조차도 다 버린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것을 그 자신의 것인 양 소유하고 있다가 스스로 버리는 것과 꼭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바라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의지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의심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것 말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이 있었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또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고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첫 시작에 있어서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한 번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찾을 때면,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그 것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에크하르트의 생애가 스코투스Duns Scotus(옥캄Ockham도 물론)와 겹친다는 게 우연은 아니겠네요.
학문적으로 세계의 현실성이 하나님의 신적 "의지"에 기대고 있다고 설명해냈던
당시 주의주의자들(Voluntarismus)과 함께
에크하르트는 영적 깊이에서 신적 의지를 붙잡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토마스 시절부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깊이 대화하던 시절이었죠.
판선생님의 표현대로라면("신학과 철학", 80-86.)
아리스토텔레스의 광범위한 라틴어 번역이 토대가 되었겠지요.
반면 에크하르트는 토마스와 함께 도미니코 수도회 사람이지요. 의지보다 지성을 강조했지요.
하지만, 틸리히에 따르면,
"프란치스코회의 주의주의가 도미니코회의 주지주의를 무너뜨렸다"(그리스도교 사상사, 236.)고 합니다.)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선, 당시의 중세는 물론 대립의 역사도 있었지만
학문과 신비의 영성이 (그리고 성서주의가) 분리되면서도
총합적으로 발전된 것으로 판단하더군요(182-185, 한글판).
개신교 일부(?) 사상가들엑게 폄하되고도 있는 시대이지만
한국 개신교가 한번도 넘어선 적이 없는 에베레스트가 아닐런지.
우리가 "마저" 가야할 길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