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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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현세에서
마음 속 모든 매듭이 풀리게 되면
그 때 그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될 것이니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다.
그는 잡히지 않으며
태어난 가문이 없고
계급도 없으며
눈, 귀도 없고
손 발도 없이
영원하며
수없이 많은 생명체이며
어디든 존재하고
그러면서도 아무런 특징도 들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세밀하며
변하지 않으며
모든 생명체들의 근원인 그를
현명한 사람은 어디서든 보리라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빛나게 하는 태양조차 빛나지 않고
달과 별들도 빛나지 않는다
그곳엔 번개조차 빛을 내지 못하니
불 같은 것이야 어떻게 빛을 낼 수 있겠는가?
그 존재가 빛을 냄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이 빛을 낸다.
모든 것이 그 빛으로써 빛나고 있는 것이다.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은
바깥의 즐거움을 쫒기 마련이고
그로써 그는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덫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안에 들어 앉은 아트만[내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흔들림 없는 확고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허망한 것들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 이 재 숙 역 -
요즘.
교회의 설교 속에서 나오는 여러 예화들보다
동양의 수도사들이 했던 명상, 생각, 글들이
저에게 더 많은 힐링(?)을 주네요.
진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서구인들의 성공했던 삶'에 관한 예화들보다
이런 '명상'글들이 더 영적인 깊이와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서양을 물질에 대한 우월함으로, 동양을 정신에 대한 우월함으로 분리하는 동도서기적인 사유들 또한 서구로 부터 몰려온 자본주의적 지배에 대한 패배감의 발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하여 '아트만'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은 연결과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은 '참자아'로서 꿈도 없는 깊은 수면의 상태에서 밑바닥에 깔려있는 순수의식을 의미합니다.
다양성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경험으로서는 주어지지 않는 세계로 요가와 같은 정신적 훈련을 통하여 주어지는 신비적인 경험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브라흐만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곁에서 삶을 통하여 경험되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은 요가나 개인적 성찰을 통하여 도달하는 지고의 세상에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또한 현실의 삶 속에서의 치열함을 통하여 경험되고 있기에 진실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다양함 속에서 드러나기에 있기에 부활은 순수함이 아니라 다양함 입니다.
그 다양함의 배후에 있는 순수함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인식의 영역에 있지 않는 초월적 영역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초월성은 인간이 초월자가 되지 않는 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일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인도의 문서들을 힌두교 내에서 성경과 같은 급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들은 사실 영국의 식민지 지배자들과 이를 뒷받침 하는 학자들, 거대한 힘에 압도되어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인도의 힌두 개혁자들 입니다.
이들에 의해 인도의 경전들은 동양의 정신문명을 대표하는 고전이 되고 인도경전의 신화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힌두교를 기독교화 하려고 했습니다.
용이한 지배를 위하여 인도를 영국과 비슷한 체제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힌두교의 순수의식의 의미들을 통해서 기독교와 접목시키려는 노력들이 이런 식민지 지배자의 노력과 혼재되어 있지는 않은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도는 순수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4,000여 년의 역사에서 보여주는 무수한 왕국의 흥망성쇠, 대화조차 불가능한 다양한 언어, 다신론에서 부터 일신론 까지 가지각색의 힌두 종파들, 고행에서 광기까지 펼쳐져 있는 수행의 방식들.
그런 의미에서 인도의 경전들 또한 다양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겠지만 이런 작업들을 굳이 해야하는 지는 또한 회의적입니다.
물론 인도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수 천년 동안 질곡에 빠지게 만들었던 경전, 지배사상들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을 위하여.
떡진머리님 안녕하세요~
먼저 글에 관심을 갖고
긴 댓글로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각하게 쓴 글이 아니었는데,
제가 여러가지로 고민을 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떡진머리님!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고 '짧은' 명상글(동양의 정신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길게' 깊은 우려와 폐쇄적인 모습이 보여서 여러가지로 아쉬움이 생기네요.
저는 오히려 떡진머리님과 같은 이런 논리와 관점들이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했던 오리엔탈리즘(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전제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카스트제도를 온존시킨 힌두교의 사상들은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힌두교의 모든 뜻과 글이 카스트제도를 온존시킨 것은 아닙니다.
위에 제가 올린 글도 그렇고요.
(댓글의 내용들중 대부분이 제 글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아 보이네요.)
제가 분명 동양정신사상에 관한 명상 글을 올렸지만,
지금 올린 글은
브라흐만을 가르치는 종교성서로 바라보기보다
한편의 문학작품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서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가벼운 글을 무겁게 만들어 버려 우선 죄송하단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해관님에 대한 반론이나 반박이라 생각하시기 보다는 미묘하게 기독교와 얽혀 인도의 철학과 종교를 '영성철학'이란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조에 대한 비판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이 비판은 제 개인적인 경험의 심리적 강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성철학자'들과의 관계속에서 많은 우려와 답답함, 일의 질곡 등 적지않은 문제에 봉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가 쓴 글은 힌두사상과 이것을 성찰 등으로 드러내고 있는 생각들에 대해 비판은 했습니다만 님이 말씀하시는 것 처럼 거창하게 이데올로기로 드러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모든 글이 카스트제도를 온존시킨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모든 글이 카스트제도를 온존시키고 있습니다.
도그마와 문학적 이해와 받아들임의 차이가 그것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어떻게 관계하고 이해되느냐의 차이가 그것을 나누는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의 지배제도의 온존과 한국사회에서 성찰이란 모습으로 나타나며 개인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는 또 다른 니힐리즘적 현상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7~80년대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단(丹)이나 참선을 통한 사띠, 바가바드기타로 부터 기원하는 개인적 성찰에 대한 경향으로 경도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이들은 사회적 운동의 패배와 전망의 부재속에서 그 존재에 대한 근거를 자신의 내부로 파고들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글은 이러한 흐름에 대한 우려입니다.
저의 글이 님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이 되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시비가 아니고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요즘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써본 것이죠
진리를 설명하기에 좋은 예화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죠.
제가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서문에서
'선포(설교)'의 '검증'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교회 교의학이 씌여진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가
보다 새로운(한국적인) 작업이 시도 되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명상 글로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선포되어지는 설교보다
더 깊은 설교로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명상에 좋은 글을 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