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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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은 나에게는 참 독특한 영화다.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니... 이게 마치 다면체를 볼 때마다 다른 방향에서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내 기억으로는 티브이에서 해줄 때마다 다 보았고... 벌써 예닐곱 번은 보았을 듯싶다...
이 영화를 보고 기독교의 위선을 고발했다느니, 반성해야 한다느니 뭣이니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완전히 빗나갔다는 느낌을 다시 확인했다...
이 영화는 기독교 고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를 잃은 한 여인(신애, 전도연)이 그 고통 속을 지나가는 이야기이며, 그 옆을 교회가 지켜주려고 애썼다고 말해야 정확할 듯...
신애와 함께 했던 교인들은 다 선량했고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그게 가능하지 않았을 뿐이다... 심지어는 신애한테 꽂혀서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따라다니던 시시껄렁 삼류인생 종찬(송강호) 조차도 신애의 고통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타자일 수밖에 없었다...
신애는 자기기만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다. 바람 피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둔갑시켰고, -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밀양에 와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돋보이려고 땅을 보러 다닌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을 시작하려고 한다니까 가짜 수료증을 만들어 온 종찬에게는 불같이 화를 낸다...
아들이 유괴 살인 당하고, 그 걷잡을 수 없는 큰 고통 속에서 그녀는 또 한 번의 자기기만을 시도한다... 자기기만의 주체는 신애였고, 교회와 신앙은 자기기만을 강화하는 중요한 도구였을 뿐이다...
그녀는 그 고통과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다...
유괴살인범을 만나서 용서해주러 교도소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난 숨을 죽였다... 그의 눈과 그의 말에 깊이 주목했다... 그가 신애 앞에서 정말로 많이 뻔뻔했는가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다... 솔직히 하루하루 힘든 복역 생활 속에서 그나마 신앙으로 견디고 있는 그에게도 신애의 방문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용서해주겠다는 설정은 애초부터 서로에게 고통을 줄 뿐이었다... 서로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서로를 위해서... 결국 잘못된 만남 속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가면을 쓰고 대할 수밖에 없었고... 신애는 스스로가 가면을 쓰고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다시 종찬에게 주목했다... 지역 유지들 아는 척이나 하고, 다방 레지 엉덩이나 툭툭 치고, 오늘 브라자를 뭘 했는지가 궁금한 속물 종찬은 유독 신애에게만큼은 너무나 순수했다... 처음 시작이야 사연 많아 보이는 예쁘장한 서울 여자에게 느끼는 신비감, 가슴 떨림이었겠지만 신애의 줄기찬 타박에도 바보처럼 보일 정도의 은근과 끈기를 보여준다...
살인범을 자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미리 용서해버린 그 미운 하나님에게 복수하러 다니는 신애는 자신의 피아노 학원 맞은 편 약국의 약사이자 교회 장로를 꼬드겨서 차를 같이 타게 되고, 유혹 당한 그는 관계를 가지기 직전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만두게 되는데... 그녀는 하늘을 향해 고소하다는 듯이 웃으며 "보고 있니? 보여?" 하면서 독백을 날린다... 졸지에 그녀를 신앙으로 이끌어주던 그 장로는 속물로 전락해버린다... (역설적으로 신애가 복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은 사실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을 위한 작업가설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자신의 내면에게 날리는 독백이 아니었을까?)
여기에서 밀양의 명장면이 나온다... 그 날은 종찬과 신애의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지만, 시간이 되어도 신애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 날 마침 생일이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머니의 걱정스런 전화를 짜증스레 받고 있던 종찬은 늦게서야 자신의 카센터에 나타난 신애를 만난다... 신애는 종찬에게 "그거 하고 싶죠? 섹스? 섹스 할래요?" 그러면서 나미의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그저 눈치만 보고 있지..." 비아냥거리듯이 노래를 하자, 종찬은 너무도 안타까운 눈으로 신애를 바라보며 "신애씨... 제발 정신 차리소" 하면서 책상 위의 물건들을 다 쓸어 던져 버린다... 놀란 신애에게 종찬은 다시 걱정스럽게 다가간다... (이 모습에서 나는 예수가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느꼈다.)
거룩함은 이렇게 은폐되어 있었다... 거룩함의 본질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는 욕망이 바로 구원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종찬은 속물근성도 있고 거룩함도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것 자체가 하나였던 것이다... 그 욕망이 신애를 향하게 되었을 때 그는 성자가 되었다...
신애는 마지막에 칼로 손목을 긋는 선택을 하면서도 하늘을 쳐다본다... 그 하늘은, 그 하나님은 실상은 신애의 허위로 가득한 내면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죽음의 상황에서 그녀는 살고 싶어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자살도 어쩌면 삶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의 몸부림일 수 있다...
퇴원 후, 종찬과 미용실에서 살인범의 딸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정 파탄의 상황에서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는 그 아이와의 대화... 너무나 미안한 듯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그 아이에게서 연민이 느껴지려는 찰나에 신애는 미용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머리도 절반도 채 다듬지 않은 상황에서... 예전엔 그래도 이 장면에서 화해하는 모습, 용서하는 모습이 나왔으면 좋지 않았겠나 생각했지만 이 번엔 생각이 좀 달랐다... 이제서야 신애는 자신과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 거울을 놓고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다듬는다... 종찬은 그녀의 거울을 들어준다... 이제 그녀는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전에 신애의 동생이 신애의 퇴원 수속을 하려고 밀양에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종찬이 밀양 역에 그를 내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밀양이 어떤 도시에요? 라는 신애와 똑같은 동생의 물음에 종찬의 대답은 좀 다르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예..." 지금도 교회에 다니냐는 물음에 "첨엔 신애씨 좋아서 따라다니다가 요즘은 습관적으로 갑니더... 안가면 마음이 그렇고... 가면 또 마음이 조금 더 좋고..."
신애를 만나고 종찬도 결국 성숙한 듯... 구원은 그렇게 쌍방향으로 오는 모양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난 이창동 영화가 너무 좋다... 오아시스, 박하사탕, 시... 이창동의 카메라 앵글은 항상 화려하지 않다... 그 축축하고 어둡침침함 속에서 항상 희망을 말한다... 이게 인생의 진실이 아닐까?
그렇군요....!
아, 첫날처럼님의 감상을 읽으니 <밀양>을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몇번 본 영화인데도...
저도 이창동 감독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