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
이 글은 만남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 대구의 예술가 그룹인 <썬데이페이퍼> 그룹지 2호에 실은 글 입니다.
만남의 존재론
만남의 실존
적대적 경쟁관계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적대적 세계 속에서 홀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힘겨움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감정의 상태들은 서로를 만나게 하는 출발이 되기도 하고 또 그 만남의 결과로 발생되기도 한다. 만남의 결과가 또 다시 두려움이 되고 힘겨움으로 되돌아오는 만남의 실패는 만남의 개체들을 고립시키고 타자와의 단절을 가져오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또 다른 만남을 기획하고 실행한다.
이처럼 실패 속에서 또 다른 만남들이 지속되는 현실은 어쩌면 우리들은 이미 ‘공동-내-존재(être-en-commun)’1)라는 존재론적 주장을 긍정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실존 형태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실존은 키르케고르의 실존처럼 결코 신이나 타자 앞에 홀로선 ‘단독자’로서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라고 지칭되는 만남조차 수없이 연기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짐을 드러내는 실존이다. 이미 중-생(衆-生)으로 만나고, 중-생을 만나는 것이다. 타자 앞에 서 있는 인간은 이미 중-생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모든 만남은 또한 연기적이며 집합적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도 개별적으로 있을 권리가 없다 : 우리는 개별적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개별적으로 진리를 파악해서도 안 될 것이다.”2) 우리들은 세계의 모든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인 미하일 바흐친은 이런 인간의 존재를 “나의 현존에는 알리바이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만남의 두려움과 힘겨움의 감정들은 개별적으로는 서로의 적대적 관계 속에서 탄생하지만 그것의 집단적 경험인 전체주의는 공포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이처럼 서로를 끊임없이 적대하는 안타곤(Antagon)의 장들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서 철학적 준비들을 마친 것들이다. 근대의 이성을 준비해준 고대와 중세의 공포들 또한 있었지만, ‘전체’를 위하여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라고, 그럴 때 인간은 살아선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실존의 완성을 보게 될 것이라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민족공동체론 또한 근대 이성의 끝자락에서 발견된 파시즘의 철학적 근거들이 되어 버렸다.3) 아도르노가 “이성의 합리성에 의한 역사적 진보의 한 극단에서 파시즘을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감옥과 같은 공동체’4)는 ‘진보’라는 근대의 틀 속에서 행해진 하나의 꿈인 공산주의의 배신에서도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실패들은 무엇인가의 결핍이나 부재로 부터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지속하려는 욕망의 과잉이 만들어 낸 결과들이다.
만남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동일화의 흐름 속에서 행해지는 소통과 융합의 목적으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은 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소통의 필요에 의해 생산된다. 이성과 합리성이란 것, 혹은 이런 근대의 반성을 통해 되돌아간 저 오래된 순수해 보이는 역사의 기억들도 만남의 성공을 결코 보장해 주지 못한다. 만남의 정념 또한 죽음에 이르는 사랑의 정념이라 하더라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한계 지워진 그 뜨거움 때문에 그것은 이미 실패를 예비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실패는 ‘융합과 연합을 위한 공모에서 비롯된 희극’5)을 통하여 연출된다.
만남은 개별적이기도 하지만 이미 집단적이기도 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도 이미 군주와 그의 국가 속에서, 어쩌면 그것 때문에 만들어진 파국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런 만남의 실패는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무위의 공동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와 같은 표현들을 블랑쇼는 바타유를, 낭시는 블랑쇼를 , 링기스는 레비나스의 개념들을 빌려 생산하게 만들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기억과 공포가 목적론적 ‘합리적 공동체’에 대비되는 공동체의 개념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블랑쇼가 ‘밝힐 수 없는 것에 주의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을 “설사 ‘무위’의 이름으로라도 공동체를 격상시키는 모든 것을 신뢰하지 마십시오.”라고 알아들었던 낭시처럼 그들은 ‘공동체’의 역설적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6) 전체주의에서 기인한 고통과 경험에 대한 경계가 이런 ‘공동체론’의 개념들을 만들어 낸 것은 오히려 역사적이지만 이것은 모든 만남을 공허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전체주의가 가져다 준 또 하나의 무력감의 표현이다. 이런 공동체는 어떠한 실천적 의미들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자명한 것은 이들이 지적한 위험들을 간과함으로써 또 다시 전체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만남의 공허한 언저리만을 맴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공허한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이 항상 이미 구성되어 있는 공동체나 아니면 시도되는 공동체의 외부에 머물 수 있는 국외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평생을 ‘얼굴 없는 사제’라는 칭호를 얻었던 블랑쇼처럼 살아간다면 모를까 '공동-내-존재(être-en-commun)'로 살아가는 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공동체의 위험과 같은 이전의 것들로부터 단절한다고 하는 의미를 모든 실천적 노력을 포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만남은 항상 실패한다고 하지만 실패라는 언표(énoncé)는 이미 언어(langue)의 관습과 규칙이 규정하고 있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라캉은 이것을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지속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붙여놓은 것들이고 그것을 통해 지속시키고자 하는 가치제계들을 옹호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던 의미로 이런 언표행위는 오히려 언어에 의해 구조화된 주체의 ‘무-의식적’ 작용일지도 모른다. 그가 무의식에서 언어적 구조를 발견함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언어의 작동방식, 특정한 기표(signifiant)가 하나의 기의(signifié)로 연결되는 것에는 동일화의 힘들이 작동된다. 여기에는 ‘실패’라는 언표의 부정의 이미지를 통해 유기체를 ‘지속’시키라거나 혹은 ‘지속됨’을 해체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담고 있는 것이다. 동일성(정체성)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특이점과 구성요소들을 고정시키는 순간 그것의 지속을 위해 구성요소들의 지위나 가치는 할당되고 위계화 되어 버린다. 전체주의는 바로 이런 ‘유기적 구성체’의 지속과 관련이 있다. 이런 구성체를 해체하는 것조차도 우리는 실패라고 언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유기체의 해체로 현행화 되는 잠재성으로 인해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결코 쉽사리 실패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머리그림은 이런 유기체의 해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며 실패의 의미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머리들의 놀랄 만한 동요는 이 시리즈가 재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움직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머리 위에 행사되는 압력, 팽창력, 수축력, 평탄하게 누르는 힘, 늘어뜨리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이 힘들은 우주선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초공간적 여행자가 만난는 힘이다. 이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전혀 예상치 않던 각도에서 머리를 후려치는 것과도 같다. 그러면 여기서 지워지고 쓸린 얼굴 부분들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7)
유기체의 지속이라는 의미에서 베이컨의 그림은 실패한 그림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기체인 얼굴의 해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그림인 것이다. 인간은 공동-내-존재(être-en-commun)지만 만남들은 그것의 지속이라는 의미에서 항상 실패로 끝나버린다. 이 말의 역설적인 의미는 인간은 실패하면서도 끊임없는 만남을 시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지속은 이런 실패의 반복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야누스처럼 하나의 실패는 새로운 성공을 의미하며 항상 차이의 반복으로 지속된다. 니체는 이것을 ‘영원회귀’라고 불렀다.
특이점들의 만남, 공動체의 의지(Will)
집단적 만남의 문제는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체성과 개체들을 유기체의 일부로 통합하고 융합하여 개체가 가지는 고유성을 잠식하는 집단성 사이의 갈등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전자를 자유주의라 칭하고 후자를 전체주의라고 부른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유주의에 이르고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을 통해 전체주의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 양자야 말로 서로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해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이 둘은 서로의 비판을 통해 결코 다른 것으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아포리아를 벗어나는 힘(conatus)을 근대의 초입에서 근대를 벗어난 철학자 스피노자로부터 발견한다. 개체란 그냥 단일한 것이 아니라 개체화의 결과이다. 그것은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결과이다. 인간이라는 개체는 여러 기관들이 모여 개체화된 것이고, 그 기관들 역시 수많은 세포들이 모인 것이며, 세포들 또한 동일하게 개체화된 것이고 심지어는 미토콘드리아처럼 오래 전 외부로부터 들어와 만들어진 세균과의 공생관계를 통한 개체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개체란 개체화가 발생하는 모든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은 고립적이거나 고유한 특권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지 않다. 스피노자는 개체는 유한하고 한정적인데 이 개체들 다수가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활동을 한다면 그것들은 하나의 개체(singular thing)라고 말한다. 8)
이런 스피노자의 정의를 통해 우리는 집합체와 개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만난다. 이런 개체의 개념은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을 ‘차이’로 무화시킨다. 개체로서의 어떤 집합체도 여러 요소들의 개체화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것은 분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항상 분할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집합체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로 묶이며 생겨나는 것을 ‘단일성(singularity)’이라고 부르는데 들뢰즈는 이것을 ‘특이점들의 집합’인 ‘특이성(singularity)’으로 정의한다.9) 단일하다는 것을 차이로 드러나게 해주는 것은 ‘특이성(singularity)’을 통해서 이다. 특이성이란 개체가 단일함을 넘어 ‘그것’이게 해주는 것, 차이를 가지게 해주는 것이다. 물은 화학적으로 산소와 수소의 특이점(singular point)들이 만나는 것인데 이 또한 한 개의 산소가 아니라 두 개의 산소와 만나면 물과 전혀 다른 성질의 과산화수소수가 되어버린다. 물 또한 그것은 얼음이나 수증기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것이 물이게 해주는 온도의 특이점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특이점의 분포나 조합이 달라지면 특이성 또한 변화한다.
특이성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외부성이다. 특이성이란 이웃하는 특이점들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내적 본질이나 내적인 고유함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단일성(singularity)’이 ‘특이성(singularity)’으로 해석될 때에는 그것은 단일하지 않고 이미 집합적이다.
물질이나 사회집단의 경우에도 어떤 특이점들이 결합되느냐에 따라 그 집합체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이점들의 구성에 따라 특이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모든 만남 또한 이런 특이점들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특이적 신체를 구성한다. 이런 특이적인 신체의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면 특이적 존재로서 의미를 상실한다. 특이성은 특이적 신체의 구성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이적 신체의 구성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기 이전의 특이점들은 잠재성(virtuality)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 잠재성이 어떤 외부와 만나느냐에 따라 현행화(actuality)되며 특이성이 된다. 특이성이란 이처럼 어떤 외부와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망치도 목수와 만나면 건설도구가 되지만 살인자와 만나면 그것은 흉기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여기서 잠재성이란 발현되지 않는 사물 자체의 고유한 어떤 성질이 아니라 다른 특이점과의 만남을 통해 항상 변화가능하고 새로움을 생성한다는 의미로서 잠재성이다.
인간의 활동 또한 그것이 무엇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자본의 파괴적인 이윤활동과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자연을 소모시키고 세상을 병들게 하는 노동이 되어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생산관계를 떠난 ‘신성한 노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체(substantia)일 뿐이거나 아니면 자연에 대한 수탈을 공모하는 자본과 노동이 자신들의 파괴적 행위를 숨기고자 붙여놓은 이름일 뿐이다.
선데이페이퍼 또한 그 구성요소들의 변화에 따라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특이성이 변화해 왔다. 성원들과 행위의 변화에 따라 그 시점에서 마다 선데이페이퍼는 각기 다른 특이적 구성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다른 구성체들이다.
특이적 구성체와 거기에 참여하는 구성요소들을 위해 특이성을 극대화 하도록 특이점들을 배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점은 공동체란 이미 존재론 적이고 실존적이기도 하지만 또한 공동체의 구성에 있어서 능동적인 영역이 존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각의 특이적 구성체는 서로 각기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단일한 특이적 구성체 안에서는 동일한 시간이 흐른다.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동일한 속성의 개념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제2부 정리 1에 의하여)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것은 어떤 때는 느리게 또 어떤 때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때는 움직이고 어떤 때는 정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10) 이때의 시간은 시계적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며 스피노자의 시간이자 베르그송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듬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처럼 함께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협-조라고 부른다. 협-조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서로 리듬을 맞추어 함께 움직이는 공-조현상이다.11) 그리고 협-조란 협조(協助)가 아니라 협과 조의 사이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무엇-되기’이다.
특이점들의 나오고 들어감에 제약이 없고, 그런 특이점들이 변화됨에 따라 달라지며, 외부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참여하는 특이적 요소들의 특이성이 최대한 표현되면서 구성되고 특이성이 분유되는 만남을 상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즈(Jazz)와 같이 서로 함께 리듬을 타면서 때때로 어떤 것들이 그 리듬의 흐름을 이끌면서 변주되는 구성체를 만드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서로의 공통의 신체적 리듬을 유지할 뿐 제도로 고정되는 안정성을 추구하지 않는 구성체.
클라스트르가 발견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들은 구성체의 유지와 존속을 척도로 삼아 위계화 되지 않는 사회를 보여준다. 이것은 국가로 발전되지 않는 미개한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발생을 억제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이다. 그리하여 특이적 구성체가 유기체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이런 사회는 제도를 통해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라기보다는 새로운 특이성의 변화가 지속되는 베르그송의 지속(durée)에 가까운 사회라고 할 것이다. 지휘와 피 지휘의 역할의 분할은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로 발전한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좀 더 높고 중심적인 지위를 욕망하게 한다. 지위가 제공하는 일반적·통상적 기능이 개체의 특이성을 대체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헤어짐을 요구하는 ‘얼굴 없는 사제’의 권유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중심화 되지 않는다는 것은 중심의 부재가 아닌 중심의 과잉을 의미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rhizome)’12)이다. 리좀은 접속(connexion)의 원리에 의해 정의된다.
접촉(contact)은 일관성(고름)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시적이거나 구성체 단계에 다다르지 않는다면 접속은 고르게 됨으로써 다양체들을 공존시킨다. 접속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이 만나 새로운 것들을 생성한다. 수목적 형태의 구성체가 뿌리라는 중심으로 모든 가지가 향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것은 땅 속에서 수평으로 자라며 새로운 식물로 자라난다. 탈주의 줄기를 통해 ‘일관성의 평면(plan de consistance)’을 형성한다. 줄기들의 모든 점은 열려있다. 다른 줄기가 달라붙을 수도 있고 다른 줄기에 달라붙을 수도 있다. 접속한 줄기들은 결코 중심을 향하지 않는다. “나무나 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이든 다른 지점과 연결 접속한다. 하지만 리좀은 특질들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 접속되는 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 체제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이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하나>로도<여럿>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13)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inter-être)이고 간주곡(intermezzo)이다.”14)
리좀적 만남, 리좀적 구성체는 이성적, 합리적으로 항상 실패한다. 그것은 우연한 생성이며 목적론적으로 진보하지 않는 차이의 반복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끼어드는 요소에 의해 새로움이 생성됨은 없던 것, 사실은 보이지 않던 것이며 그것을 가시화 한다. 클레의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는 이야기와 “회와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는 들뢰즈의 생각,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이라는 랑시에르의 기획은 외부의 요소인 특이점들의 배치와 분포에 따라 일어난다.
만남은 항상 실패한다. 하지만 실패는 보이는 것이 단절되는 문턱일 뿐이다.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공동체(community)가 아닌 공動체(commun)는 항상 실패와 넘어섬을 통해 다가온다.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항상 실패하면서도 만남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다시 한 번’
--------------------------------------------------
1) 낭시는 블랑쇼나 링기스가 밀고나간 레비나스의 타자개념을 통해 인간실존의 유한성(finitude)을 인정하지만 또한 이 유한성 때문에 항상 ‘외부의 존재하는(ex-position)’ 이와 함께-현전(現前)(com-paraître)하는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2) 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옮김, 니체전집 1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339쪽
3) 하이데거의 민족공동체 존재방식으로 ‘본래적 존재’나, 세계가 주체에 기입되는 존재로서 현존재인 ‘세계-내-존재(Dasein)’는 그 존재의 방식에서 이미 전체주의를 향해 자신을 열어두고 있었다.
4) 모리스 블랑쇼, 장-뤽 낭시, 박상준 옮김『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문학과 지성사, 2011, 80쪽
5) 같은 책, 80쪽
6) 같은 책, 125쪽
7) 질 들뢰즈, 하태환 옮김,『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71쪽
8) 바루흐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서광사, 2010, 82쪽
9) 질 들뢰즈, 이정우 옮김,『의미와 논리』, 한길사, 1999, 122쪽
10) 바루흐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서광사, 2010, 98쪽
11) 이진경,『콤뮨주의 선언』, 교양인, 2007, 172쪽
12)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천개의 고원』, 책세상, I
13)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천개의 고원』, 책세상, 46쪽
14)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천개의 고원』, 책세상, 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