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3일
대제사장 관저에서(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14:62)
예수님은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다는 것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궁극적인 것을 보려면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궁극적인 것들, 또는 의미 충만한 것들은 대개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둑을 예로 들어봅시다. 가로 세로 19줄의 모눈 눈금으로 된 바둑판에 흑과 백의 돌들이 놓여 있습니다. 바둑의 경지에 따라서 그 안의 세계가 서로 다르게 보입니다. 낮은 단계의 사람에게는 몇 가지 수의 가능성만 보이지만, 높은 단계의 사람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가 보입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수가 잘 안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잘 보일까요? 그리고 그 수의 깊이가 끝이 없을까요? 바둑의 수는 바로 도(道)이기 때문입니다. 도는 드러난 것이 아니라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경 첫 머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규정하면) 그 도는 원래의 도가 아니다.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궁극적인 것 중의 가장 궁극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과 똑같은 사건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종말이 이르러야 볼 수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으로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이 완전히 구별됩니다. 생명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때서야 우리는 참된 생명을 볼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이 불완전하냐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종말의 생명에 비해서는 불완전하지만 종말의 생명을 덧입을 것이기에 이것으로 완전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종말의 생명을 덧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위 말씀을 묵상하는데, 김춘수시인의 <꽃>이 생각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본다'의 뜻이 우리 두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이제 눈치로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였지요.
그동안 많은 해설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 주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납죽 엎드려 있던 '본다'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니
이제 주저없이 일어나서 화사한 '꽃'이 되네요..^^
오, 온 존재를 깨우시는 생명의 영이여!
그의 위대함을 찬양하라!
속리산 서북릉에 갔다 왔을때의 일을 생각하며 적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찾지 않는 능선에서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다른 방향의 길로 갔습니다.
골짜기로 빠지는 느낌이 들어, 전체 지점이 잘 보이는 봉우리에서 몇번씩 자세히 살펴보다가
이 길이 아님을 감지했습니다.
왔던길을 땀을 흘리며 다시 거슬려 올라가 갈라진 능선 분기점에서 다시 판단하여 원래의 목적지의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느낀점은 이렇습니다.
하나,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산 전체의 조망 할 수있는 지점, 또는 봉우리로 가야 합니다.
둘,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바로 수정할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셋, 잘못된 길 이전의 갈라진 능선까지 다시 가려면 평소의 체력 관리가 필요합니다.
넷,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산행의 한 부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섯, 힘들면 잠시 휴식을 취할수 있는 시간 즉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위의 사항들이 오늘 말씀 묵상과는 다른 내용을 주저리 읆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세계를 들어가는 자는 때론 잠시 다른 방향으로 갈 수있다고 봅니다.
오류를 수정할수 있는 것이 바로 영성이겠지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