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을 정의로운 분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이상한 구석이 많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냥 방관하는 게 아니라 직접 다스리신다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하는 질문이오. 그걸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소. 어떤 아이들은 부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어떤 아이들은 가난뱅이 부모 밑에서 태어나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펴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모든 게 술술 잘 풀리는 사람들도 있소. 똑같은 한민족이지만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남한에 사는 사람들은 풍요롭게 살고 있소. 남한 사람들이 모두 잘 사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풍요로운 것만은 분명하오. 세상은 왜 이렇게 공평하지 못하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뭐 하고 있는 거요?
이 질문에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소. 다만 우리의 관점을 다르게 하는 것이 최선이오. 최선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옳소.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공평하다는 사실은 대개가 소유와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관계된 것이오. 몇 평 아파트에 사는가에 우리의 관점을 둔다는 것이오. 관점을 바꿔보시오.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로 삶을 보는 거요. 이런 관점이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 앞에 있었던 요소들은 미미해진다오. 어른이 되면 어릴 때 구슬이나 딱지를 많이 가진 것으로 흡족해 하던 것이 시시해 보이는 것과 같소. 그런 것이 시시해보이면 세상은 이제 달라지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오. 오히려 세상이 공평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크게 움직일 거요. 이런 말이 공자 왈로 들리지 않았으면 하오.
그대는 혹시 세상살이는 그런 새로운 관점으로만 버텨내기가 힘들다고 말하고 싶소? 그걸 내가 왜 모르겠소. 세상의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하고 따지고 싶소? 그걸 내가 왜 모르겠소. 노숙자들에게, 쪽방에 사는 이들에게, 불의의 사고로 평생 장애인으로 힘들게 사는 이들에게, 노동에 시달리는 제삼세계 어린이들에게 공평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이 세상의 악한 질서에 반기를 들고 투쟁해야 하오. 그러나 새로운 관점이라는 문제는 좀 다른 것이오.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되, 그것이 불평으로부터 나오면 곤란하오. 불평으로부터의 투쟁은 결국 계급투쟁이 되고, 그것은 결국 또 하나의 왜곡된 질서를 만들게 될 거요. 동유럽의 실패가 바로 그것이오. 정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심정의 구체적 실현이오. 이런 신앙에 들어간 사람들의 눈은 이미 인간에 의해서 왜곡된 질서를 뚫고 임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보이오. 생명의 심층에서 나오는 통찰이며, 고백이오.
쉽게 말하겠소. 그대는 이미 내가 무얼 말할지 눈치 채고 있을 거요. 모든 사람은 각각 자기가 숨을 쉬어야 하오. 다른 사람이 대신 쉬어줄 수 없소. 부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이 대신 쉬어줄 수도 없소. 얼마나 공평한 일이오. 모든 사람은 앞만 볼 수 있소. 앞을 보면서 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소. 얼마나 공평한 일인지 모르겠소.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소. 테니스를 즐기면서 동시에 꽃을 돌 볼 수는 없소. 대통령이 장차관을 모아놓고 국정을 의논하면서 동시에 유치원 아이들과 놀아줄 수가 없소. 얼마나 공평한 일인지 모르오. 누구나 곧 죽어야 한다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공의가 어디 있겠소. 이런 말이 그대에게 공허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소.(2010년 9월14일, 화, 가을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