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보고 듣소.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들은 예외요.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오. 우리 비장애인들은 보고 듣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소. 보고 듣는 것이 제한적인지는 여기서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오. 오히려 거꾸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 때문에 더 근원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소.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철저하게 상대적인 감각 기능이오.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보고 듣는 행위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일상의 사건이오. 지금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소? 직장의 사무실에서 작업하는 중이라면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거나, 또는 자동차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는 중일지도 모르겠소. 아이를 목욕시키는 중일 수도 있소. 퇴근하는 중이라면 지하철이나 승용차 안에 있을 거요. 무엇이 보이오? 또 무슨 소리가 들리오?
보고 듣는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소.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소. 그 이유는 그대도 잘 알고 있소. 돈벌이, 저술, 실험, 싸움 등에 우리의 마음이 휩쓸려 있기 때문이오. 그런 일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보고 듣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소. 그러나 그냥 보는 것과 대상과 일치해서 보는 것은 다르오. 그냥 흘려듣는 것과 소리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면서 듣는 것은 다르오. 우리의 영혼이 예민해지지 않으면 모든 대상과 소리가 상투성에 떨어진다오. 영혼이 예민해진다는 말을 착각하지 마시오. 자기에게 예민해지는 것을 가리키지 않소. ‘존재’(Sein)에 마음을 연다는 뜻이오. 그 존재는 은폐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생명의 근원을 가리키오.
성경읽기도 이와 비슷하오. 성경에서 무엇을 보고, 무슨 소리를 듣소? 물론 문자가 보이고, 조금 마음을 그쪽으로 열면 어떤 소리도 들릴 거요. 동양의 가르침에서는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이 하나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본다고도 하오. 성경을 붙잡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오. 교회성장과 프로그램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말씀과 하나가 되지 못하오. 겉으로는 열광적인 포즈를 취하겠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관심일 뿐이오. 올 한 해, 세상을 정확하게 보고, 그 세상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시오. (2011년 1월6일, 목)
영혼이 예민해 진다는 것은 자기에게 예민해 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마음을 연다는 뜻이다. 존재는 은폐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생명의 근원이다. 끊임없이 묵상하게 하는 신앙의 화두일 듯 싶습니다.
유식불교에서 안이비설신의라 하던가요? 안식이 가장 저급한 식의 패턴이라고요...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던가요? 한번 보는게 백번 듣는것과 같다는 말은 또 뭘까요?
둘다 맞겠죠? 어떤 자리서 바라보고 있느냐의 식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니까요.
조율이란 개념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보는것과 듣는것과 맡는것과 등등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내면에 축적된 인식의 과거와 뒤섞여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보이는 현실과 축적된 현실사이의 조율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야 바로 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고민역시 그런 생산적 조율을 위한 귀한 기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