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지 않는 한 대충 5초에 한번은 숨을 쉬오. 숨을 쉬지 않고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면 편하지 않겠소? 태아들은 숨을 쉬지 않고 사오. 탯줄을 통해서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오. 원리로만 본다면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소. 깨끗한 피를 공급해주기만 하면 되오. 우리가 숨을 쉬는 이유는 피에 산소를 공급하려는 것이오. 앞으로 언젠가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해서 약 한 알로 일주일 동안 몸 안의 피에 산소 공급이 이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오.
숨은 입과 허파로만 쉬는 건 아니오. 우리의 피부가 숨을 쉬오. 숨구멍을 통해서 끊임없이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거요. 화상을 입어서 피부의 70-80%가 손상되면 생명이 위험한 이유도 피부가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오.
숨을 보면 생명 현상의 본질이 소통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 숨을 쉬지 못하면 죽듯이 외부와 소통이 안 되면 생명은 끝이라면 말이오. 자폐증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 장애요.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부와의 소통에 장애를 보이고 있소. 자신의 성채를 쌓은 데만 마음을 두고 있소.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건지, 또는 죽어 가는 건지도 모르오.
신앙은 더 근본적인 숨쉬기요. 하나님과의 소통이 그것이오. 기도를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이라고 하오. 자신의 영혼을 절대 세계로 개방하는 태도를 가리키오. 이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자신이 이룬 업적에서 삶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더 근원적인 생명의 힘에 의존한다는 뜻이오. 이 세상의 생명 형식을 초월하는 것이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까지 초월하는 것이오. 초월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질 거요. 말 그대로 건너감을 뜻하오. 나를 넘어서는 것이오.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소.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또는 어려운 일도 아니오. 어머니는 아이들 앞에서 늘 자기를 초월하오. 자기를 한없이 축소하는 거요.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하나님께로 초월하려면 자기 축소 이외에는 길이 없소.
그대는 오늘 얼마나 숨을 쉬었소? 숨은 생물학적 일상의 기초요. 자율신경이 작동하니 잘 때도 물론 숨을 쉴 거요. 숨 쉬듯 하나님과 소통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겠소. (2011년 1월7일, 금)
또 우문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만드실 때, 자기축소를 본질로, 본능으로 창조하셨으면, 이런 난잡한 세상도 없지 않았을까요?
저의 책임, 저의 의무를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힘껏 애를 써도, 안되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때로는 두렵고, 의문스러워, 질문드려봅니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라고 하신다면, 할 말은 없네요. -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