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문제의 추상화는 극단적인 내세주의자들에 의해서만 주장되지 않는다. 나름으로 사회의식이 있고,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서도 주장된다. 수년 전에 ‘청부론’ 논쟁이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김동호 목사가 청부론의 대표자이시다. 청부론은 말 그대로 기독교인들이 깨끗한 부자로 살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분은 여기에 덧붙여 ‘고지론’도 주장하셨다. 고지론은 기독교인이 사회의 중요한 자리에 먼저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세상이 바뀐다는 주장이다. 그 중요한 자리가 전투용어인 고지이다. 전투에서 고지를 선점하면 전투에서 유리하다. 고지론과 청부론이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린 것 같다.
깨끗한 부자가 누군가? 성경에도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인물들이 나오긴 한다. 믿음의 모범을 보인 아브라함과 야곱은 당시 족장들로서 상당한 재력가였다. 애굽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 요셉도 당당한 부자다. 청부론의 관점에서는 동방의 의인으로 일컬어졌던 욥이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깨끗한 부자들을 성서에서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런 성서읽기는 기본의 오류다. 성서는 제 각각 주어진 하나님 경험에 대한 고백이지 깨끗한 부자가 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깨끗하다는 말과 부자라는 말은 형용 모순에 속한다. 기업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라. 그것은 기본적으로 경쟁논리이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경쟁자와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기업이 성장한다. 요즘 비정규직 문제를 보라. 기업주의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을 통해서 인건비를 줄이는 게 선이다. 합법적으로 세금을 적게 내는 것도 선이다. 지금은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마저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비정규직 교수들이 양산되고 있다. 심지어 정부의 지원금을 타기 위해서 거짓 보고서 작성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마당에 깨끗한 부자라는 말이 가능한가?
오해는 말자. 기독교인이 부자로 살면 무조건 큰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기업가는 늘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은 기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은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제하고 최대한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돈벌이를 해야 한다. 돈은 그냥 돈으로만 보면 된다. 칼은 칼로만 보면 되듯이 말이다. 청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