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팔복의 첫 항목은 이렇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 심령은 헬라어 프뉴마다. 프뉴마는 히브리어 루아흐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것은 영, 내적인 생명, 바람, 숨이라는 뜻이다. 종교적인 깊이가 가장 깊었던 민족인 히브리인들과 철학적인 깊이가 가장 깊었던 민족인 헬라인들이 세상을 비슷하게 보았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 부분적으로만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대인들의 언어 세계를 공부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부분적인 생각을 관통하는 진리에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뉴마는 낱말풀이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념이다. 모든 단어는 개념이다. 특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단어는 개념적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개념은 고정된 게 아니다. 움직임이며, 변화이다. 어떤 차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개념이다. 그걸 한 두 마디로 완전하게 전할 수는 없다.
히브리인들과 헬라인들은 루아흐, 또는 프뉴마라는 단어를 통해서 어떤 세계를 표현해보려고 했다. 오늘 우리의 말로는 영, 바람, 숨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다. 영과 바람은 오늘 우리에게 각각 완전히 다른 세계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는 그게 같은 세계였다. 영은 사람의 내면세계에서 사람을 살리는 힘이고, 바람 역시 밖에서 오지만 사람을 살리는 힘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만물을 살리는 힘이다. 그것은 동시에 죽이는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영과 바람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했다. 한 마디로 줄이면, 프뉴마는 생명의 힘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은 생명의 힘이 가난한 자라는 뜻이다. 이게 좀 말이 되지 않는다. 가난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리킨다. 프뉴마, 즉 생명의 힘이 가난하다는 말은 어색하다. 그것보다는 약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마태복음 기자는 어떤 생각으로 누가복음 기자와는 달리 프뉴마와 가난을 연결한 것일까?
시골생활이 장난이 아닙니다.
할 일이 끝니 없습니다.
이러다가 다시 보따리 싸서
아파트로 가는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네요.
오늘 저녁에는 마당일을 하다가
모기에 너무 뜯겨서 일정을 당겨 일찍 들어왔습니다.
성서와 기독교의 세계는
단순히 인간의 종교적 감수성을 만족시켜주는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모든 운명을 책임 있게 해석하고 경험하고
그리고 희망하게 합니다.
베르디의 레퀴엠을 듣는 것보다
백배는 더 진지한 자세로,
횔덜린의 시를 읽는 것보다
천배는 더 환희에 찬 자세로
성서와 기독교의 세계를 대하는 게 좋습니다. ㅎㅎ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장맛비에 화초들이 쓰러지진 않을까요..
오늘의말씀이 그냥 감사함으로 다가와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다비안으로 지내면서 참 많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중요한것들을 알았어요.
성서언어를 못 쓰겠다라구요~ 개념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아는체를 했었네 뭐 그런 부끄러움 이었어요.
고대인의 사고. 인문학으로 성경읽어보는거,,
개념안으로 들어가는일에 자신이 생기나 봅니다~
글을 읽을때 가끔씩 "모른다"는 목사님의 표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