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6일(월)
죄와 고
어제 설교 중에 죄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불교의 고(苦)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고는 ‘괴로워하다’, 또는 ‘쓰다’는 뜻이다.
삶이 고해와 같다는 말도 한다.
여기서 고는 불행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행복하다고 여기는 모든 삶의 조건들도
결국은 사람을 얽매기 때문에
사람은 한평생 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연봉 높은 직장에 들어가고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딸 잘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고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삶이 고라는 사실을 더 절감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누군가를 헤치게 되어 있다.
한 직장을 다니면서 어떤 사람이 승진하면
승진하지 못한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에 새로운 신자가 오면
어떤 교회에는 신자가 준다.
우리가 먹는 후라이드치킨을 생각해보라.
닭은 인간의 섭생을 위해서
끔찍하게 사육되고 도살된다.
우리의 발걸음에 채여 죽는
작은 생명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세상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기에
아무리 조심해도 대상을 힘들게 하거나
더 나가서 파괴하게 된다.
삶을 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가 고를 말하는 이유는
사람을 비관론에 빠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비심을 갖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인생이 고라는 사실을 안다면
측은지심이 들지 않겠는가.
기독교의 죄 개념이 불교의 고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아도
인간의 어떤 한계 상황을 비슷하게 본다는 점에는 통하는 게 있다.
죄 개념은 인간을 죄책감에 빠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
생명과의 단절이라는 절박한 상황을 뚫어보게 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삶을 경험하게 한다.
죄를 통해서 우리는 결국 자유를 경험한다.
부활의 생명 방식은 다른 이들의 생명을 파괴하지 않고ㅡ음의 엔트로피를 끌어들이지 않고ㅡ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