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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9일(목)
삶(8)
어제는 영생 이해가 시간 이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연대기적인 시간 이해에 떨어지면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런 상태는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이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실제로 죽지 않을 운명으로 산다면
인간은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죽음을 구원으로 여길 것이다.
부모도 죽고, 스승도 죽고, 친구도 죽고, 자식도 죽는데
자기 혼자만 쨍쨍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해보라.
연대기적인 시간 이외의 시간을 모르기에
지금 우리는 영생을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성경은 왜 영생을 말하고 있을까?
성서가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의미와 똑같다.
영생은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영생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말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한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아는 게 아닌 것처럼
영생을 다 아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내버려두고
하나님과의 일치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다.
성서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나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나,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표현들이 다 그것을 말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로 거기에서
삶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열정적으로 매달려 있는 일상은 다 가버린다.
거기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삶은 빈 껍질만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