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7일(금)
삶(12)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지금 우리의 삶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뚫어보아야 한다.
그게 없으면 저런 주제에 얽힌 기독교 교리는 관념에 떨어진다.
삶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깊은 사색이 없어도
웬만한 통찰력만 있으면 알게 되어 있다.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또 다시 배가 고프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여전히 외롭고,
아무리 건강식품을 챙기고 운동을 열심히 해도
병이 걸릴 사람은 병에 걸리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우리의 유한하고 잠정적인 삶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걸 절실하게 느끼고 사는 사람이 있고
대수롭지 않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실질적으로는 못 느낀다고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는 느낀다.
그래서 나름으로 완성의 길을 충동적으로라도 찾는다.
그게 우리의 일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연봉, 집, 학력, 가족, 권력 등을 확대함으로써
자기의 삶이 완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영적인 차원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차원에서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종교행위를 자기와 가족의 복에 맞춘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가서 자기 자식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출세하고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빈다.
그런 태도가 인지상정이라서 한편으로 이해가 가긴 하지만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걸 목표로 한다면 굳이 기독교 신앙을 따를 필요는 없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자식들이 잘 될 수 있으며,
그렇게 기도해도 자식들이 안 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삶, 즉 생명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본다.
우리 스스로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생명이 완성될 수 없다.
그게 피조물의 실존적 한계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는 삶의 태도다.
이게 단지 기독교 교리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인문학적 토대에서도 근거가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신학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삶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 이해에 비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