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0일(목)
아래 이야기도 어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나온 거다.
10장의 내용은 유대인들과의 논쟁이라는 점에서
9장과 연속된다고 할 수 있다.
요 9:41절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과
예수님을 한 데 묶어 죄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세의 권위에 기대서 그렇게 말했다.
모세의 권위는 율법에 있었다.
율법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영적으로 눈이 밝은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셨다.
율법의 권위에 의지하는 것이 바로 죄라고 말이다.
죄는 못 보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게 무슨 뜻일까?
“너희 죄가 그대로 있으니라.”는 말씀을
사람들은 어떤 도덕적인 잘못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죄는 생명과의 단절이다.
죄가 그대로 있다는 말은
여전히 죽음에 매여 있다는 뜻이다.
더 줄여서 말하면
율법은 죽음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율법은 좋은 것이다.
율법이 있어야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가치, 제도가 다 율법이다.
사회 존속의 필수 요소인 율법이
왜 죄이며 죽음인가?
이런 문제는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것의 약간 다른 부분을 보충하면 되겠다.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을 담을 수가 없다.
법만 해도 그렇다.
우리의 실정법이 정의와 평화를 다 담을 수 있을까?
교회법이 교회의 정의와 평화를 다 담을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늘 변혁되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사로잡혀 있어서
예수님을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볼 수 없었다.
그 일이 안식일에 행해진 것이라는 사실만 눈에 보였다.
진리와 생명을 밀쳐두고 율법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근본을 못 보게 되고
따라서 죄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일들은 현대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진리와 생명을 볼 수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언제쯤 믿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