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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16)
앞서의 묵상 마지막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를 통해서 종말론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생명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은 자칫 뜬구름 잡는 것으로 들린다.
생명은 실질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희망은 막연하게 들리니 말이다.
이 문제를 확 눈에 드러날 정도로 명확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다.
다만 거기에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것뿐이다.
희망은 막연하게 기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독교적인 희망은 궁극적으로 미래의 사건이지만
이미 이 자리에 일어난 어떤 것을 포함한다.
부활 신앙을 보자.
우리는 종말에 부활생명을 얻는다고 믿고 희망하지만
이미 여기에서도 그것을 경험한다고 믿는다.
그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휩싸고 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걸까?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예술적인 영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
그게 눈에 보이는 건 아니다.
영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서
매일 위대한 예술작품을 쏟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에는 위대한 작품이 숨어 있어서
기회가 주어지면 세상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그는 부활 생명의 힘에 휩싸여서 살아간다.
그 생명을 향한 희망이 그의 영혼에 가득하다.
이 세상에서 때로 지치거나 실수를 하겠지만
그는 이미 생명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으로 보면 되겠군요.
나는 항상 '나'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가 보고 말해주는 타인의 시선의 '나'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알고 있던 이야기로군요.
충만한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