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도 가능하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철학이나 구도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흔한 말로 철학은 질문이고 종교는 대답이라고도 한다.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런 반론도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학을 너무 크게 여기면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반론에 대해서 일일이 대답하지 않겠다. 그런 질문들이 나름으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지적인 능력 여부와 상관없이, 더 나가서 종교 여부에 상관없이 궁극적인 질문이 인간에게 왜 가능한지만 간단히 짚겠다. 이건 설교자이면서 동시에 목회자인 목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기독교 인간론의 기초다.
성서 전통에 따르면 사람은 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몸과 영이 인간의 구성요소라는 뜻이다. 몸으로 산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인간은 귀신이 아닌 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지구 안에 있는 질료를 공급받아야만 생명을 영위할 수 있다. 반면에 영으로 산다는 것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 인간은 몸의 삶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게 그것이다. 인간에게는 영적인 만족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몸으로서의 인간은 배가 고프면 본능적으로 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영으로서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적인 만족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영적인 만족을 위해서 인간은 학력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영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질문할 줄 모르는 건데,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몸이 병들면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허기를 느끼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듯이 영적인 갈망을 느끼지 못하면 죽는다. 그런 죽음의 징조가 한국교회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매달리는 반면에, 정작 중요한 것에는 무덤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