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3일
골로새 교회(3)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다.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다. 골로새서의 발신인은 바울(공동 발신인 디모데)이며, 수신인은 골로새 교회 신자들이다. 무슨 말인가? 골로새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에서 기록된 문서라는 말이다. 그 역사는 물론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과 우리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크다는 사실이다. 1백년도 아니고, 1천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2천년이다. 그런 시간의 차이를 감안하지 않은 채 성경의 내용을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골 3:22절에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한 말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이런 구절을 근거로 종과 상전이라는 사회구조를 바울이 인정했으니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성경에 대한 오해이자 왜곡이다. 최근에 교육부 고위층 인사가 국민들을 ‘개, 돼지’ 운운했다가 된서리를 맞고 있듯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없지는 않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는 언급도 마찬가지다.
성경과 우리 사이에 놓인 계곡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작업이 해석학이다. 신학은 다 이런 해석학을 기본으로 한다.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교회 역사를 배우고, 교회의 교리인 조직신학 등을 배운다. 골로새교회와 오늘 골로새서를 읽는 우리 사이에도 이런 해석학 작업 없이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놓여 있다. 그런 작업보다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거나, 성령의 도우심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런 주장은 자유다.
한국교회는 해석학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제대로 된 설교를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교인들이 불쌍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