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염려와 근심
마르다는 요한복음과 바로 이곳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리아의 언니지만 성경에서의 비중은 동생에게 밀린다. 마리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마리아보다 마르다에게 인간미를 더 느낄 것이다. 좋은 뜻으로 대단히 인간적이다.
마르다는 바쁜 일로 염려와 근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을 대표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는 이미 통계에 잘 나와 있다. 노동의 양과 강도는 세계에서 손가락에 들 정도로 높다. 목사로부터 교회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도 모두가 쫓기듯이 신앙생활을 한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다. 목사들은 특히 염려와 근심이 많다. 그런 염려와 근심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내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마르다의 부엌일처럼 필요하기는 하나 본질이 아닌 것들이다.
염려와 근심을 전혀 하지 않고 사는 게 실제로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 염려와 근심 되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아주 크게는 갑자가 불치병에 걸리거나 실업자가 되는 거, 작게는 연봉이 줄어들거나 가족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다. 나이 든 자녀가 일정한 직업도 없이 빈둥대면 부모로서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신자가 트집 잡는 식으로 교회에서 말썽을 부리면 목사로서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거꾸로 목사가 신자들의 근심거리가 되기도 한다.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사람이 다 초월해버리거나 일시적인 근심까지 않을 수는 없다. 문제는 인생 자체를 염려와 근심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우리를 이런 삶으로 몰아간다. 교회도 여기서 제외된 게 아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종종 설교의 주제가 된다. 대다수 목사들은 마리아의 영성을 바르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걸 좁은 의미로만 본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았다는 것을 기도와 말씀생활이라고 본다. 신자들은 마리아의 영성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교회 안에서 마르다처럼 산다. 무늬는 마리아인데, 속은 마르다. 그런 신자들이 교회에서는 칭찬을 받는다. 이런 말을 교회 일에 방관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이들로서
대한민국류의 세상의 염려와 근심 없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공부, 외모, 출세, 돈, 건강...등
그러나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예수 안에 있으니 마리아의 영성을 가져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