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0일, 수
생명의 깊이
지난 5월7일 설교 제목은 ‘생명의 깊이’였다. 부활절 절기에 딱 들어맞는 제목이다. 부활은 생명의 깊이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부활은 기독교 용어이고, 생명의 깊이는 인문학적 용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내용적으로는 동일하다. 기독교 용어를 인문학 용어로 풀어내지 못하면 성경을 회중들에게 전할 수 없다.
설교에서 생명의 깊이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시간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개념이다. 시간은 태초와 종말이다. 우리의 생명은 태초와 종말에 연결되어 있다. 지금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소립자는 다 빅뱅 사건과 연관되며, 미래의 종말 사건과 연관된다. 정말 아득한 시간이다. 생명의 깊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은 공간적으로 지구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더 나가서는 우주 전체와 연결된다. 생명은 무한정 넓고 깊다. 그래서 아득하다.
생명의 깊이를 아득하게 인식하고 느끼고 삶과 일치시키는 경험이 있을 때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독단에 빠지거나 열광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런 경험은 고급의 학문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공부가 부족한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냐, 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 제법 있다. 내가 반복해서 말한 거지만 생명의 깊이에 대한 공부는 학력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삶을 직면하는 사람이라면 일자무식이라도 그런 경험이 가능하다. 인문학 훈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이들보다 좀더 빨리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긴 하다. 생명의 깊이, 생명의 신비, 생명의 현묘!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느데요.
사랑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