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5.14.
눈 먼 교사
마15:10-20
내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어떤 특정한 날을 정해서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별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가 일년에 한번이라도 스승에 대한 생각을 바로 세울 수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일인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스승의 날이 되면 스승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작은 선물이라도 합니다. 어떤 학부모들은 이 날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녀의 스승에게 어떤 예의를 갖추어야 할른지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스승의 날을 기리는 의도는 의무적으로, 혹은 의례적으로 스승을 찾아가거나 부담스러운 마음으로라도 선물을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진리를 배운 분을 향한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승은 길잡이입니다. 스승을 통해서 이 세상은 운영됩니다. 유치원 부터 시작해서 대학에 이르기 까지, 뿐만 아니라 우리 전체 삶을 통해서 스승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배웁니다. 그런 가르침과 학습을 통해서만 이 세상은 유지됩니다. 그런 만큼 스승은 우리에게 그 어떤 사람 보다 중요한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형식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남아 있지만 참된 관계는 허물어진 지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승을 단순히 지식전달자로 생각할 뿐이지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스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먼저 알고 있는 지식을 판매할 뿐입니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 참된 인격적 신뢰가 아니라 지식을 상품으로 한 시장관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십중팔구 교사들이 먹구 살기 위해 자기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사들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소명감을 갖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많이 젖어 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이 제공된다면 대단히 많은 교사들이 교사일을 그만 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참된 교육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지금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몇 년 전 <참교육>을 시켜 보자는 일부 교사들의 운동이 있었습니다만 별로 적극적인 지원이나 동의를 받지 못하고 많은 희생과 상처만 남겼습니다. 이게 우리의 교육현실이며, 한계입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인기나 끌 수 있는 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개혁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고, 교육을 바르게 이끌어 가야할 교사당사자들은 철저하게 무기력하며, 학부모들은 교육의 이상에 대한 꿈을 아예 갖고 있지도 못합니다. 이런 비통한 교육현실 속에서 스승의 날을 맞는 우리는 최소한 참된 스승의 본질이 무언가를 오직 유일한 스승이라 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벌어진 종교적 전통에 관한 논쟁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교의 중요한 전통인, 식사 하기 전에 손씻는 일을 행치 않았다고 책망을 했습니다. 이들에게 장로들의 유전, 즉 그 전통을 지키는 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전통을 지키지 않자 그게 못마땅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정통했던 그들의 주장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럴듯 했습니다. 어느 누가 장로의 유전을 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어서, 결국은 둘 다 구덩이에 빠질 뿐이라고 했습니다. 자타가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며 최고 스승이라 인정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이 <눈 먼 스승>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 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여러 번 그렇게 불렀습니다. 마23:16에 보면 그들을 향해서,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했으며, 마23:13, 15, 23, 25, 27에서도 역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눈이 먼 교사들이라고 말입니다. 눈이 먼 사람이 백성들을 인도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왜 예수님이 그들을 가리켜 <눈 먼 자>라고 했는지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시대에서 가장 계몽된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기들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말 엉터리로 보였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손을 씻어야 했는데 그런 순서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종교적 의식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만이 인간이 깨끗해 지는 바르느 길이라고 확신했으며, 그걸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사람들도 그런 가르침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손을 정결하게 씻고 식사를 해야만 한다는 율법은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위생적인 시대에, 그리고 먼지가 많은 지역적 특성 때문에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청결의식에 참여케 해야만 건강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부터 이런 전통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하나의 유전, 즉 전통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식사 전에 손 씻는 일이 잘못된 것일까요? 예수님이 그 행위 자체를 문제 삼으신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문제는 유대인의 전통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입니다. 손 씻는 일이 절대적인 이념이 되어 그것을 행치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손 씻는 일 보다도 마음을 씻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겉으로 교양을 쌓는 것 보다는 마음 속의 교양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19, 20절은 이렇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 차이를 구분 못하고 제자들이 손 씻지 않은 일로 트집을 잡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눈 먼 자들에 불과하다는 게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속 마음은 곪아 터지는데도 겉으로만 그럴듯 하게 보이려고 애쓴는 그들은 눈 먼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각 속에 놓여 있습니다. 겉 모양을 중시 여기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적 가치가 축소되고 자본주의적 가치가 높아갈수록 더욱 더 이런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돈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사회적 가치일까요? 만약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가 살아야 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최근에 고3 학생을 대상으로 치루어진 대입 모의고사에서 대구 지역 학생들의 학력이 급격히 높아졌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최상의 수준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많은 관계자들이 가슴 뿌듯하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아마 대구, 경북 교육위원회에서는 자신들의 정책이 성공적이었다고 흐믓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대구, 경북 교육위원회에서는 고등학교 지원 원칙을 서울 대학교 합격자 배출에 따르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말하자면 서울대학교에 많이 입학시키는 학교에는 파격적으로 많은 재정을 지원하고, 그렇지 못한 학교에는 푼돈이나 던져주겠다는 말입니다. 대구, 경북 교육감의 이런 교육정책에 힘입어 이번에 대구 경북 지역에서 높은 학력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우리 지역 학생들의 실력이 높아졌다는 데 반갑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대학입학 만을 기준으로 학교를 판단한다는 것, 그리고 좋은 업적을 낸 학교에만 일방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발상이 철저하게 바리새주의적이고 서기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실력이 없는 학교에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요? 물론 학교가 학생들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실력이 저하되었다면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하겠습니다만, 지금 그런 학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입시지옥과 같은 체제에서 좀더 인간중심적 교육을 실시하므로써 학력이 낮아졌다면, 이건 오히려 바람직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학력이 높아지는 건 좋은 일입니다면 그것만을 평가기준으로 삼는 교육정책은 예수님 말씀대로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린 청소년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이건 학부모와 교사들과 정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게 부과된 사명입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입니다. 컴퓨터 잘 다루는 아이들로 교육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무역을 잘해서 돈을 잘 버는 아이들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웃 공동체를 이해할 줄 아는 아이로 가르치는 일입니다. 기술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키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우선 순위는 분명해야 합니다. 먼저 인간이고, 다음이 기술입니다. 먼저 정의감이고, 다음이 세일즈 기술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의 실정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 이런 교사들은 소경에 불과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교회교육이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 바리새인들의 생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했다는 점을 꼬집었습니다. 장로의 유전, 그 전통을 어겼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어떤 종교적 습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큰 일인 것 처럼 생각합니다. 누가 기도를 많이 하는가, 라는 경쟁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기도를 합니다. 문제는 그걸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가 무슨 자랑거리나 되는 것 처럼 드러냅니다. 정작 중요한 사람의 마음 가짐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를 하지 않으면서 종교적 습관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적 경건성과 갖고 있고 인격적 변화도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어디에 삶의 무게를 두는가, 어디에 신앙의 기준을 두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정말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중생이며, 구원입니다. 무엇이 인간을 더럽게 하는 건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 처럼 종교적 전통이나 앞세워 남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속마음이 새로워지는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손 씻는 문제에만 매달려 정작 중요한 새로운 삶은 내팽개치고 맙니다. 이게 우리 기독교를 미래를 볼 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저는 경주에 있는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 은퇴식에 갔었습니다. 감동적이어야 할 그 은퇴식이 웬지 어둡게 느껴졌습니다. 그 교회는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은퇴 목사님의 인사말에서도 그런 암시가 있었을 정도이니까요. 행사 당일에도 어떤 집사들이 행사를 방해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 까지 마귀가 시험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비교적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신 분이었습니다. 자기가 때로 과격하고, 때로는 몰상실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어떤 방법이었던지 교회만 부흥시키면 좋다는 생각이 우리 기독교안에 팽배합니다. 교회를 위한다고 하기만 하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기만 하면 아무리 비인격적인 행동을 해도 용납되는 게 우리 한국 교회의 풍토인 것 같습니다. 이는 곧 오늘 본문에 나온대로 손 씻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격입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교회는 사회로 부터 점점 밀려나서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쩌면 소경이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한 건지, 무엇이 본질적인 건지, 하나님이 원하는 게 무엇이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열심히 외치고 뛰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저 소경들이 모여서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찾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이보다 더 과격하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겉으로 열심히 백성들을 가르쳤지만 그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질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건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선생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당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하니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 그들은 분명히 사람들을 구덩이에 빠뜨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딴에는 무언가 열심히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구덩이에 빠진 것 같습니다. 연속적인 사고나, 패륜적인 범죄만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전반적인 사회의 방향이 그렇게 건강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다고 합니다만 그럴수록 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깊이는 천박해져 가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흡사 우리는 모두 “이전투구”에 급급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습니다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오히려 구덩이에 빠지는 걸 배우는 게 아닐른지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방법만 배웠지, 어떻게 약한 자를 돌아보며 많은 사람에게 봉사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건 많은 지식을 배울수록 더욱 깊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랍니까? 학교 선생님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기를 원하십니까? 우등생입니까? 출세의 길을 용케 찾는 이들입니까? 아니면 선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입니까? 아이들을 남보다 공부 잘하는 쪽으로만 이끌어가는 선생은 소경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바르게 가는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생이야말로 올바른 스승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14절).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면 “그냥 두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마음 문이 닫혀 있는 경우에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이 나라 대통령에게는 어떤 말을 할까요? 이 나라 대학교 선생들과 중고등학교, 국민학교 선생들에게는, 이 나라 종교지도자들과 우리 먼저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해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