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6-21, 세계구원의 공동체

조회 수 6578 추천 수 0 2009.07.31 21:46:53
 

1995.6.25. 설교

세계구원의 공동체

요3:16-21 


오늘 우리는 교회창립 9주년을 맞습니다. 우리는 지난 9년 동안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해왔습니다. 우리가 함께 이루고 있는 교회는 어디에서 존재이유와 근거를 갖고 있을까요? 교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창립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 처럼 교회도 역시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근본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을 때만 바른 길로 부터 벗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구원을 바라보고 구원을 외칩니다. 성경의 주제가 바로 구원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만 요3:16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어서 17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두 구절을 연결해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키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내용입니다. 멸망이 아니라 영생이며,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는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에 참여해야 하고 구원을 외쳐야 합니다.

구원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내용이고 목표입니다. 아무리 출세하고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구원과 관계가 없다면 그건 헛된 삶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돈버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가르칩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 모든 걸 극복케 하는 구원을 말합니다. 인간구원과 관계되지 않는 교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그거 다 아는 얘기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말로는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구원과 상관 없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런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건 사실 구원지향적입니다. 몸을 망쳐가면서 까지 돈을 벌려는 것이나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면서 까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펼치려는 모든 행위는 그런 것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걸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좋다는 게 바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서로의 이기적 생각으로 인해 충돌이 빚어지고 분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건 구원이 아닙니다. 사이비 구원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그런 목표는 가까이 갈수록 인간을 탐욕스럽게 만들고 인간을 파괴시킵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이 세상의 영과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거짓 구원론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거짓 구원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참된 구원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당장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에 마음을 주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므로써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성취감이 또 다른 욕심을 불러일으킵니다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악순환 가운데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참된 구원을 용감하게 말해야 합니다. 요3:16에서 일컫고 있는대로 “영생”에 이르는 길을 교회는 외쳐야 합니다. 이 영생, 이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는 필요합니다. 그런 목표가 아니고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친목단체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건 맛을 잃은 소금에 매달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는 부단히 구원을 말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서만 우리 교회의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2. 교회가 말하는 구원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세상에서 살짝 빠져나와 자기들 끼리 구원약속에 도취해서 살아가는 이들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기의 존재이유로 삼고 있는 구원은 바로 세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교회만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입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말씀에 속이 상할지 모릅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아니라 악한 세상을 사랑하신다니 말이 되는가, 라고 언잖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분명히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의 영적인 다이나믹은 전세계적 교회로 부터 관심과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가 별로 건강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악하다고 보고 심판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복음찬송가의 가사에 있는 것 처럼, 가능한대로 세상으로 부터 멀리 달아나는 게 좋은 믿음생활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 나가 전도를 하긴 합니다만 그건 세상으로 부터 사람들을 끌어내려는 생각이지 세상 자체를 긍정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듣습니다. 자꾸만 세상을 멀리하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교회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의 악을 사랑하셨다거나 세상에 빠져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의 악한 부분을 확대하여 일단 부정적으로 보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완전히 악하지도, 완전히 선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교회 땅도 많이 사고 주식도 많이 사서 어떤 힘을 기르자는 뜻에서의 관심이 아니라 세상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런 일을 매우 소홀히 했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키우는 전도의 열심은 있었지만 세상의 구원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전도와 세상구원이 같은 거 아니냐, 고 반문할 지모르겠스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는 교회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며, 세상구원은 세상 자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교회의 행위입니다. 세상구원은 신학적인 언어로 말해서 <Missio Dei>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선교에 참여할 뿐입니다. 이런 선교개념에서 볼 때 교회는 교회의 성장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되고 사회의 건강을 위해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1919년 3.1절 독립운동에는 열심히 참여했는데, 해방이후로 사회가 비민주화 되고 군사정권이 철권통치를 해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통일이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현안임에도 불구하고 그 통일을 위해서 교회가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통일이 된 이후에 평양과 원산에 가서 교회를 세우겠다는 계획만 세우고 있습니다. 외국 노동자를 위해서, 극빈자를 위해서, 감옥에 같힌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회가 닿을 때 약간의 도움을 줄 뿐입니다. 이런 행동은 여전히 교회가 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가, 아닌가에 상관 없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매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을 교회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주일에 헌혈을 하거나, 매월 마지막 주일에 쓰레기를 줍는 등의 일도 역시 Missio Dei에 참여하기 위한 작은 노력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느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3. 세상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준다고 했으며, 17절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예수와 구원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진리로 믿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을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단순히 우리의 영적인 구원과 관계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건 믿는 거고, 세상살이는 세상살이라고 나누어 버립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잘 믿고 죽어서 천당가면 되고,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해야 구원받는다고 확신합니다. 세상에서는 세상방식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개 그렇게 살아갑니다. 세상의 질서는 예수와 상관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 질서에 맞는 방법으로 처신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걸 보면 이런 말이 맞습니다. 예수를 종교적인 문제에만, 영적인 문제에만 가두어 둔다는 말입니다. 이건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구원을 외쳐야 합니다. 세상문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멧세지를 어떻게 세상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 가면 지금도 간혹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만 지하철이나 지하도 입구, 고속뻐스 터미날 등지에서 큰소리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순수성이나 열정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기독교 신앙은 이런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게 전도는 아닙니다. 동네가 시끄럽게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불러서 교회 옆 땅값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안하무인으로 그들을 굴복시킬려고 달려가는 것이 기독교의 전도는 아닙니다.

그 길은 예수의 말씀대로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므로써 예수믿고 구원받는다는 게 무언지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그게 전도입니다. 중요한 건 역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밤새도록 예수의 이름을 외쳐 불러도 그분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태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그의 행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그가 살아간 모습이 판단 기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살아온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쌍용 자동차 조립공장이 구지에 들어서야만 이 지역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경제가 활성화 되어서 모두가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정말 행복해 지는 걸까요? 만약 여전히 이기적이고 배타적으로 살아간다면 부자가 될수록 더욱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구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된지 벌써 9년이 되었습니다. 내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어떤 교회의 모습을 가졌을까요? 앞으로 어떤 교회로 자리매김을 해야할까요? 우리는 세계구원을 외쳐야 합니다. 누가 좀더 많이 갖고,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사는가에 우리 생명을 바쳐는 게 아니라 세계구원에 바쳐야 합니다. 너무 거창한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십니다. 세계구원에, 우리 교회가 있는 이 지역의 구원을 위해 매진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을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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