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6:16-18, 금식의 교훈

조회 수 8822 추천 수 2 2009.07.31 21:59:27
 

1996.3.31.  설교

금식의 교훈

마6:16-18


요즘이야 굶는 이들이 별로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굶기를 밥먹듯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동냥을 해서 그날 그날 끼니를 때우는 소위 ‘거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대한민국 백성들이 서구라파와 북미 나라들 만큼은 안되도 어느 정도 풍요와 복지를 일구어 냈기 때문에 굶는다는 말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나 해당되는 말이 됐습니다. 우리 주변 곳곳에 먹을 게 넘쳐나고 있습니다. 작은 동네 음식점으로 부터 시작해서 고급호텔의 뷔페 같은 곳에 이르기 까지 정말 먹을 게 많고, 또한 사람들이 많이 먹어치우기도 합니다. 우리집 아이들만 그런지 모르지만 그 아이들은 소고기 국을 끓여도 고기를 먹지 않고 건져냅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야 일년에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특별한 명절이나 어른들 생일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고, 국에 들어 있는 소고기 한점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고기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식성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요즘의 먹을 거리가 너무 넘쳐나는데 그 까닭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먹을 게 만다는 건 우리 삶의 양이 풍성해졌다는 걸 말하고, 이로 인해 생존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 바람직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풍요가 곧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게 삶의 역설이며, 또한 먹거리의 풍요가 오히려 우리를 먹는 일에 탐닉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다양하게 먹고, 그걸 통해서 얻어진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더 많은 소유와 소비를 원하게 되는 게 오늘 현대인이 추구하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물론 인간이 무언가를 즐겁게 먹는다는 게 죄는 아닙니다. 그런 당연한 행위이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기도 합니다. 다만 오늘의 이런 삶이 결국 육체의 즐거움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므로써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종교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런 육체를 절대시하는 삶으로 부터 영적인 차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자세를 뜻한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나 기독교 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가 절식이나 금식을 중요한 종교행위로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이슬람 교도들은 회교력의 9월에 마호멧에게 내려진 첫 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철저하게 금식합니다. 금식은 주로 새벽 부터 해가 질 때 까지 계속되는데, 목욕이나 음주, 흡연 등 불필요한 일체의 사치행위가 금지됩니다. 유대인들의 관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의무적인 금식은 일년에 한번 뿐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세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의식이었으며, 둘째는 회개의 증거였고, 셋째는 대속적 행위로써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이런 금식은 일상적 삶의 권태로 부터 벗어나게 하고, 영적인 건강을 회복케 했으며, 실제적으로도 육체의 건강에 도움도 주었습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 금식 내지 단식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위장의 내용물을 걸러내고 비우므로써 몸안에 남아 있는 독성을 제거하게 되며, 이런 훈련을 통해서 원래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양양분만 섭취할 수 있다면 적게 먹어서 병에 걸리기 보다는 많이 먹어서 그렇다는 사실에 대해 현대의학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건강의학적인 면에서 중요한 금식이 많은 경우에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금식을 일종의 자기경건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16절)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장날인 월요일과 목요일에 규칙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이 날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금식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을 땅에 끌기도 하며, 길거리를 화보하고, 심지어는 자기 얼굴이 창백해 보이기 위해 흰색으로 칠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금식행위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교만한가를 제자들에게 경계하셨습니다.

이들의 금식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행위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지적하셨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분명히 종교적인 것인데, 실제로는 인간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만 속으로는 인간적인 생각에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일부러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경건을 과장되게 보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이들은 예수님 당시 만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종교행위입니다. 아주 많은 경우에 교회 안에서도 역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봉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만 신앙적인 모습이었지 실제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인간적인 모습만이 팽배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거나 별볼 일이 없다고 생각되면 자신이 하던 모든 일들을 송두리 채 포기해 버리기 일수입니다. 작은 교회에서야 이런 일이 없습니다만 어느 정도 큰 교회는 장로직 때문에 심각한 싱갱이가 벌어집니다. 만약 순전히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면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누가 장로를 하는가, 아닌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니다만, 장로라는 직이 그래도 교회 안에서 드러나고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직을 차지하려고 과할 정도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작은 신앙생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는 자세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기도는 순전히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건데도 자꾸만 이 기도를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점을 신경쓰게 됩니다. 물론 아무리 신앙생활이라 해도 백 퍼센트 하나님만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인 자세가 분명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삶의 자세는 종교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무진장하게 수고를 합니다. 일전에 자녀교육의 과열문제가 TV 토론 주제로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학부모의 고백인즉은 다른 어머니들이 그렇게 하니까 자기도 그걸 의식해서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문제도 그렇고, 경제문제도 그렇고, 가정문제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살아가다 보니까 정작 자기의 삶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다른 사람의 생각만 따라가다가 끝나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어딘가 들떠 있습니다. 정치로 부터 시작해서 일상적인 삶에 이르기 까지 안정적이지 못한데, 이는 바로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려는 데 너무 신경을 많이 쓰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헛수고를 하는 게 바로 우리 한국사람들의 일반적 삶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냉수를 마시고도 이빨을 쑤신다는 말 처럼 우리가 고쳐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허위의식, 혹은 자기기만입니다.


예수님은 17,18절에 바른 금식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을 하되 그 티를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행위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지름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칭찬을 많이 받을수록 하나님의 칭찬은 멀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은밀한 중에서 은밀한 신앙을 보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진실할 수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칭찬이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향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누가 뭐라 하든, 누구에게 인정을 받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다면 우리의 봉사는 꾸준할 겁니다. 이런 저런 시험이 와도, 인간적으로 실망할 만한 일이 있어도 왠만하면 흔들리지 않고 봉사하게 됩니다. 이런 신자들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 신앙이 굳건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비밀이며 신비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에게 보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요?

하나님에게 보이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큰 축복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축복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발린 칭찬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온전한 칭찬인가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말씀을 여러분은 흘려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때에 따라 틀리는 수가 많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말에만 솔깃해서 살아가다가는 항상 뒤숭숭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바른 자세를 갖고 있다면 결국 하나님이 모든 걸 갚아주십니다.

오늘 금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교훈은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의 중심을 사람들에게 놓지 말고 하나님에게 올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이리저리 마음을 바꾸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게 우리 마음의 중심을 놓고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한 가지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이나 실제생활에서 불안하거나 짜증스러워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틀림 없이 여러분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으로 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불안해지게 됩니다. 점점 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다가 지쳐버리게 되고, 그 도가 지나치게 되면 모든 걸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이런 유혹은 목사들에게도 있습니다. 목회를 잘해서, 성공적으로 해서 능력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말씀입니다. 목회의 능력을 발휘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다는 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교회 부흥은 그저 교회부흥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것으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 때문입니다. 어떤 피아니스트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니까 음악을 사랑할 수 없게 되더라고 말입니다. 다른 사람 보다 반드시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게 되니까 음악이 괴로워지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마음,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 때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지며, 그때 부터만 우리는 가치있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종교적 업적, 세상적인 업적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요. 그분이 여러분의 중심을 보시고 특별한 축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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